옐런 美재무 ‘예금 전액 보호’ 발언에 도덕적 해이 논란
“소규모 은행에서 위험이 확산되면 예금을 보호해 주겠다”는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의 발언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은행이 망해도 예금을 전액 보장할 경우 은행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고위험·고수익 투자를 늘리고, 예금자들도 위험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높은 수익을 주는 은행으로 몰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한국은 예금자 보호 한도가 작기 때문에 더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은행 경영진의 위험 행동 장려할 수도”
옐런 장관은 21일(현지 시각) 미국은행연합회(ABA) 콘퍼런스에서 “지금까지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시그니처은행의 예금 전액 보호 등) 우리가 취한 조치는 특정 은행이나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 광범위한 미국 은행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라며 유사시 예금 전액 보장 조치를 확대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미 은행 시스템은 안정되고 있다. 우리의 금융 시스템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한) 15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도 했다. 옐런 발언으로 ‘은행 줄파산 공포’가 누그러지며 이날 뉴욕 증시는 S&P500지수가 1.3% 오르는 등 상승세를 보였다.
하지만 주요 외신과 전문가들의 반응은 주식시장만큼 우호적이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상황이 안정되고 있고 미국 은행 시스템이 여전히 건전하다면 굳이 예금 보호까지 해준다는 확신을 줄 이유가 무엇이냐”며 “모든 예금이 보호될 것이란 발언은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예금을 전액 보호해주면 예금주들이 실리콘밸리은행(SVB)처럼 부실하더라도 더 많은 고객 혜택을 주는 은행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은행 경영진도 예금이 빠져나갈 우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자산을 운용할 동기가 사라지게 된다.
파산한 SVB의 고객이 수십억~수백억원을 굴리는 테크 기업들이라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도 나온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은행이 건전한지 따지지 않고, SVB에 거액을 예치한 기업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게 됐다”며 “이것이 더 무책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라고 했다.
◇한국 예금자 보호 한도는 선진국보다 낮아
예금자 보호 한도 확대에 대해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예금자 보호 한도가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선진국보다 크게 낮기 때문이다. 미국의 예금자 보호 한도는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3.3배에 달한다. 반면 우리나라 한도인 5000만원은 1인당 GDP의 1.2배에 불과하다. 일본(2.3배), 영국(2.3배), 호주(2.7배) 등 주요국과 비교해도 낮은 편이다. 예금보험공사가 국회 정무위원회 김희곤 의원(국민의힘)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예금 중 보호 한도인 5000만원을 넘어서는 금액은 2017년 758조4000억원(전체 예금의 63.3%)에서 작년 말 1242조5000억원(67.7%)으로 급증했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자는 목소리가 커진다. 지난 20일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가 예금자 보호 한도를 1억원 이상으로 늘리자는 내용의 예금자 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고,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의원도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을 지난달 20일 제출했다. 금융당국과 예금보험공사는 오는 8월쯤 적정 보호 한도에 대해 결론을 낼 예정이다. 보호 한도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1억원까지 2~3단계에 걸쳐 높이는 방안 등을 모두 검토 중이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면 대출자 등의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금보험공사는 각 금융사들이 내는 보험료(예금 잔액의 0.08~0.4%)로 예금보험기금을 조성해 예금자 보호에 활용하는데, 보호 한도를 높이려면 보험료율이 올라가 대출자들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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