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사마리아 교정 프로그램

기자 2023. 3. 23.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밤거리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걸음을 멈춘다. 둘러보니 노새 한 마리가 전봇대 앞에 서 있다. 비쩍 마른 정강이에 선혈이 낭자하다. 하얗게 드러난 뼈도 보인다…노새가 왜 이런 곳에? 눈을 떴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낯선 방이다. 여전히 꿈속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옆의 협탁 위에 놓인 얇은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는 <사마리아 교정 프로그램>이라고 적혀 있다. 손을 뻗어 펼쳐보았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다면, 교정 대상자로 선택된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프로그램의 명칭은 성경 속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율법 학자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데,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예수는 강도를 만나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예로 든다. 같은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은 불행을 당한 이를 알아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치료하고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예수는 율법 학자에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네 이웃은 누구인가?”1)

2016년, 대전에서 승객 두 명을 태우고 달리던 택시의 기사가 갑자기 의식을 잃는 일이 있었다. 차량은 앞차와 추돌하여 멈춘다. 승객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기사를 방치한 채 트렁크 문을 열어 골프 가방 등을 꺼낸 뒤, 다른 택시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119에 구조 요청도 하지 않았다. 기사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심장마비였다. 나중에 승객들은 ‘공항버스 출발 시간이 촉박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정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결한 것을 멀리하라는 지배계층의 율법을 따랐다. 사마리아인은 정치적으로 반목하던 유대인에게 상당한 비용을 쏟아 자선을 베풀었다. 프로그램의 목적은 이들을 비난하거나 칭송하는 게 아니다. 당신을 돕는 사람이 곧 이웃이라는 빤한 결론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물론 인간의 본능은 설탕물 주위로 몰려드는 개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눈 역시 돈과 권력의 단맛으로 향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웃으로 보고자 하며 그들이 당신을 도울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불행을 당한 사람이나 이방인에게 눈길을 돌리는 일은 드물다. 그들을 보아도 같은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나 짐승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예수는 묻는다. 누가 네 이웃이냐고.

당신은 여러 번 이웃을 외면했다. 교정의 목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곧 당신의 이웃임을 알아보는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다. 당신은 꿈 작업을 통해 현실을 상세히 반복 경험하면서 진실을 보는 눈을 얻게 된다. 인류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웃을 돌보는 성향은 진화의 과정에서 유리하다.

선택된 대상자를 은밀히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일종의 납치극을 벌여야 했다. 당신은 비명을 지르거나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외면했다.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 교정의 목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 대부분이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무관심해야 프로그램이 작동한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치유되는 날, 교정 프로그램도 완전히 종료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올 것인가.’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스르르 눈이 감겼다. 다시 꿈이 시작되었다.

밤거리다. 치킨과 피자와 감자튀김이 아스팔트 위에 나뒹굴고 있다. 저 앞 전봇대에 오토바이가 쓰러질 듯 기대어 있다. 헬멧을 쓴 소년이 몸을 떨며 휴대전화를 든 채 울먹인다. 피가 흐르는 소년의 비쩍 마른 정강이를 바라보며, 망설이기 시작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정강이 부서진 소년이 희게 세탁한 말들을 꺼내 밤을 널면 오토바이 범퍼에 남아 있는 낮의 칼자국은 벽을 사이에 두고 무릎을 맞댄다 시작과 끝이 닿는다.”2)

1) 누가복음 10장 25절~30절
2) ‘한 소년이 살았네 #call me’, 우은주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