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택시를 탄 게 아니라 詩를 탔다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입력 2023. 3. 23. 00:00 수정 2023. 3. 2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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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일로 탄 택시지만 교통정체로 발만 동동, 마음만 더 다급해져
그때 기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쓴 시 한번 읽어보실래요?”
한 사람 인생 그곳에… SNS에 올리자 “나도 그 택시 탔다” 잇따라

지난달 아침에 급한 일이 생겨서 택시를 탔다. 어딘가로 이동하면서 노트북으로 글 마감도 해야 하는 날이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노트북을 꺼냈는데 배터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통 정체 중이었다. 휴대폰을 꺼내서 메모 앱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은 화면으로 쓰니까 분량이 감이 오지 않았다. 중간중간 전화가 걸려와서 글쓰기가 계속 멈췄다. 교통 정체는 여전했다. 마음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는데, 택시 기사 분께서 나직하게 한마디를 하셨다. “바쁜 일 없으시면 옆에 놓인 글이나 구경하실래요? 내가 쓴 시들이에요.”

/일러스트=양진경

그 한마디에 처음으로 택시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바로 옆자리에 파일에 끼워진 종이들이 보였다. 기사님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시만 보고 다시 일을 시작할 마음으로 파일을 펼쳤다. 20여 분 후, 나는 여전히 파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성을 가득 담은 손글씨 때문이었다. 아마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내려 가는 것에만 집중한 듯한, 시 한 편마다 지긋한 시간이 듬뿍 담겨있는 듯한 글씨들이었다. 그 글씨들을 읽으며 나는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선물받은 느낌이었다. 선물받은 여유로움으로 시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술에 관한 시부터, 자동이체에 관한 시, 등산과 산책에 관한 시, 오랜 세월 동안 쌓아나간 사랑에 대한 시까지, 아주 다양했다. 파일 한 권을 읽으며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이 맑은 에너지로 가득 충전되고 있었다. 그 충전된 마음으로 다시 휴대폰을 꺼내어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글 마감을 해나갔다.

마감이 끝나는 동시에 택시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치 택시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시를 타고 온 느낌이었다. 공간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이동한 느낌이었다. 그날 하루종일 마음이 충만했다. 이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서 SNS에 사연을 적고 시 한 편의 사진을 업로드했다.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많은 SNS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들도 예전에 그 택시를 탄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마음에 드는 시를 사진으로 찍어서 소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1년 전 마음이 힘들어서 잠시 일을 쉴 생각이었는데, 그 택시에서 시를 읽고 치유가 되어 지금까지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2018년에 그 택시를 탔었는데, 내가 업로드한 그 시 한 편을 똑같이 업로드 했다. 저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저마다의 방전으로 힘들었던 이들이, 똑같은 시를 읽고 마음이 충전되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일상의 작은 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참으로 뭉클한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방구석에 쌓아두었던 시집들을 다시 꺼내서 읽어보았다. 일을 하기 위한 책들만을 읽느라 한동안 시집을 읽지 않았다. 새로 산 책을 읽는 것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작은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시의 내용만을 읽었는데, 그날 밤은 시를 감싸고 있는 흰 여백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여백이 있었기에 시가 쓰여졌을 것이다.

그 택시를 타고 난 이후, 시가 시간으로 느껴졌다. ‘시와 시의 간격’에 흐르고 있는 지긋한 시간을 읽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마음이 급해질 때마다 그때의 택시를 떠올린다. 시간이 듬뿍 담긴 손 글씨를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도 작은 여유가 생겨난다. 그렇게 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찬찬히 써내려간 글씨처럼, 찬찬히 내가 할 일들을 해나간다. 아마도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일상이 밀려오면,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 다급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교통 정체처럼 꽉 막히는 순간이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 다시 한번 그 택시를 탈 수 있기를 바란다. 전력 질주로 방전되어버린 마음을 한 편의 시로 충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도, 언젠가 그 택시를 타고, 짧은 마음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상상해본다. (그 시를 처음으로 읽는 순간의 설렘을 위해, 일부러 시를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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