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변방에서 좋아하는 책과 나만의 리듬으로… 그 최소한의 요건은

한겨레 2023. 3. 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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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그래서 완전한 도서정가제는 책방 노동자들이 본업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다. 지금은 15% 할인까지 가능한 이름뿐인 도서정가제지만 동네책방에겐 이나마도 아주 작은 숨구멍이다. 책을 좋아하고 동네책방의 순기능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낼 수 있는 영역의 마지노선이다. 이마저 붕괴한다면, 또다시 많은 동네책방들이 사라질 것이고 지원금 사업에 매달리면서 책방들은 자기다운 색깔을 잃어갈 것이다.
1978년에 지어진 낡은 집을 1년 동안 여름나무님과 함께 리노베이션해서 책방을 열어가고 있다. 전기공사와 배관공사를 제외하고 조적·미장·바닥공사는 물론 천장을 털고 루버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직접 하면서 우리들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이재성

이재성 | 공주 길담서원 서원지기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틈이 생기면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약속장소도 주로 서점으로 잡았는데 조금 일찍 도착해 맘에 드는 책을 고르면, 내용이 궁금해서 자꾸 들여다보느라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행복했다. 그때 그 행복했던 느낌이 근무시간은 길고 월급은 적은 책방에서 일하고, 결국 책방을 운영하도록까지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2008년부터 서울 서촌에 있는 한 동네책방에서 일하게 됐다. 1980~90년대 동네책방은 책만 분류해 꽂아놓으면 손님들이 알아서 골라갔고, 그렇게 서점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서점의 등장과 도서정가제의 붕괴로, 동네책방은 책을 매개로 참가비를 받는 문화행사 공간의 역할을 겸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책이 책방의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으로 물러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독서모임과 강독모임, 강연, 전시회, 음악회, 답사 등을 기획해서 두세 명의 최저임금과 운영비를 만들어내며 지낼 수 있었다.

이 또한 2020년께 무렵부터는 힘겨워졌다. 도서관, 문화재단, 평생교육원 등 공공기관에서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비슷한 사업들을 무료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10시간씩 일해도 책방 운영이 녹록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지원금을 받는 사업을 하거나 다시 변신을 도모해야 할 시점에 코로나19까지 닥쳤다.

1978년에 지어진 낡은 집을 1년 동안 여름나무님과 함께 리노베이션해서 책방을 열어가고 있다. 전기공사와 배관공사를 제외하고 조적·미장·바닥공사는 물론 천장을 털고 루버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직접 하면서 우리들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이재성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균형을 이루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었다. 그 마음이 우연히 방문한 충남 공주시에서 발아했던 모양이다. 함께 일하는 여름나무님과 1년간 직접 집을 수리하고 자서전적인 도서를 중심으로 하는 책방을 열었다. 물론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이미지가 텍스트를 집어삼켜 본질이 전도된 시대 아닌가. 책도 내용보다는 디자인이 아름답거나 언박싱하는 순간 느끼는 소소한 기쁨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그래서 표지만 새로 만든 리커버북이나 동네책방 에디션이, 어떤 책이 담겼는지 알 수 없게 포장해 궁금증을 유발하는 블라인드북이, 이러저러한 내용을 담았다는 안내 쪽지를 붙여놓은 책이 많이 선택받는다고도 한다. 한번 해볼까? 갈등했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책방의 본질을 생각했고, 아무런 매개체 없이 독자가 좋은 책을 직접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했다. 좋은 독서를 위해서는 좋은 책을 스스로 골라내는 연습도 필요하다. 이미 ‘선택된 선택’이 아니라 좀 더 ‘펼쳐진 선택’을 연습하는 것이 일상에서 다양하고 다층적으로 사고하며 자기 삶을 창작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획일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고민은, 어쩌면 ‘변방’에서 ‘중심’을 바라볼 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오전에 공부모임을 하거나 빵을 굽고 걸어서 출근한다. 음악을 크게 틀고 화분에 물을 주고 청소하며 배송 온 책들을 정리한다. 다섯시간 근무하고 퇴근길에 텃밭에 들러 감자, 토마토, 가지, 상추, 붓꽃이나 산국 등을 거둬서 식탁에 올린다. 이런 여유는 변방에 사는 즐거움이다. 수입은 서울에서의 절반도 되지 않지만 후회는 없다. 비싼 옷도 좋은 자동차도 관심 없다. 상품으로서의 가치보다 기능을 중요하게 여기며 산다. 19년 된 자동차를 타고 10년 된 오븐에 빵을 굽지만 이렇게 사는 삶도 괜찮다.

그렇다고 늘 좋지는 않다. 온종일 문 열고 있어도 방문객이 없는 날이 잦고 누군가 온다 해도 매출은 미미하다. 우리 책방의 수입은 대부분 공부모임에서 나온다. 주로 저녁에 줌으로 만난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원서강독은 선생님이 계셔서 간단하게 일정만 챙긴다. 발표가 있는 영어 원서강독은 사전에 예습을 한다. 서울에서부터 꾸준하게 진행되던 자서전 읽기모임은 편한 마음으로 하지만, 아침에 하는 <동경대전> 읽기모임은 첫 동학 공부여서 좀 헤맨다. 여기에 가끔 특강도 열고 개별적인 손님들을 맞으면서 주5일 30시간 안팎으로 일한다. 줌이 없었다면, 아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정한 수입은 삶의 근본이어서 그것이 보장되지 못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다. 그래서 완전한 도서정가제는 책방 노동자들이 본업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다. 지금은 15% 할인까지 가능한 이름뿐인 도서정가제지만 동네책방에겐 이나마도 아주 작은 숨구멍이다. 책을 좋아하고 동네책방의 순기능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낼 수 있는 영역의 마지노선이다. 이마저 붕괴한다면, 또다시 많은 동네책방들이 사라질 것이고 지원금 사업에 매달리면서 책방들은 자기다운 색깔을 잃어갈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의 리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각자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적당히 하면서 여유를 갖게 된다면, 밖의 기준이 아닌 각 개인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먼저, 사회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내부가 단단해져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을 책방을 하면서 배워가고 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1978년에 지어진 낡은 집을 1년 동안 여름나무님과 함께 리노베이션해서 책방을 열어가고 있다. 전기공사와 배관공사를 제외하고 조적·미장·바닥공사는 물론 천장을 털고 루버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직접 하면서 우리들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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