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Picture] 1 공급망 2 디지털전환 3 수소경제 한일 新경제협력 좌우할 '세 개의 퍼즐조각'

2023. 3. 22. 16:2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정:한일 경제협력의 시작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은 전후 한일 경제협력의 초석이자 시발점이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은 무상자금 3억달러, 유상자금 2억달러, 상업차관 3억2000만달러를 한국에 공여하고, 한국은 대일(對日)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하였다. 물론 대일청구권의 범위를 둘러싼 한일 양국 간 극심한 이견이 현재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로 표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일본의 청구권 자금 공여는 포항제철소(현 포스코) 설립으로 상징되듯 한국의 경제 부흥에 일조하였고, 대한(對韓) 수출과 직접투자 등을 통한 일본 경제의 부흥에도 기여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의 외환위기:한일 경제협력의 재시동

한일 경제협력은 1990년 엔 차관이 종료되고 나서부터 민간 협력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조짐을 보였다. 1980년대 말 한국은 소위 '3저 호황'을 바탕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대일 관계에서도 한일 무역 불균형 시정이라든지 양국 간 투자 환경 개선, 양국 재계 단체 간 협력과 같은 민간 부문 간 협력을 주장하였다. 1997년 말 한국을 휩쓴 아시아 외환위기는 한일 경제협력의 지평을 과거 일본의 대한(對韓) 자금 지원에 더해 일본 자본·기술의 국내 유치 확대 등 민간 협력으로 확장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98년 10월 정치, 안보, 경제, 인적·문화 교류, 글로벌 이슈 등 5개 분야에 대한 한일 협력원칙을 담고 있는 소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는 지금도 퇴색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98년 10월 일본 정부가 소위 '신(新)미야자와' 구상을 통해 발표한 일본수출입은행의 수출금융 지원, 50억달러의 한일 통화스왑 체결 등은 여전히 한일 경제협력 프레임워크가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대한(對韓) 자금 지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뚜렷이 드러냈다.

한일 경제협력의 굴절

정부 간 협력이든 민간 협력이든 한일 경제협력에 파열음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끝내 무산된 2004년 말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일 간에 민간 협력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어 미래 지향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는 FTA 체결이 적격이라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그 후 2008년 들어 2011년까지 실무급 회의를 수차례 개최하는 등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FTA 체결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결국 한일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 우리 측 정부의 소극적 자세로 협상은 무산되었다. 2013년 7월에는 앞에서 언급한 신미야자와 구상에 따른 50억달러의 한일 통화스왑 계약이 종결되는가 하면, 2015년 2월에는 아세안+3(한·중·일)의 다자간 금융협력체인 치앙마이이니셔티브(CMI) 체제하에서의 한일 간 100억달러 통화스왑도 종결되었다. 다만 한일 간 통화스왑 종결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경험하였던 한국 경제가 그만큼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였고 경협 상대국도 다변화하였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한일 FTA 협상 무산과는 약간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19년 7월 일본이 단행한 반도체 관련 3개 품목(불화수소, EUV용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규제는 한일 경제협력 프레임워크를 파탄으로 몰고 간 악수였다. 당시에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각종 수출통제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였지만, 그 경제적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그것은 일본이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출규제라는 경제적 수단을 동원한 경제책략(economic statecraft)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코로나 팬데믹과 맞물려 그간 정부 주도의 한일 간 경제협력을 단절시켰다는 점에서 이의는 없어 보인다.

지난 3월 17일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번 정상회담이 한일 관계의 정상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두고 봐야겠지만, 한국이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주도하고 그것도 민간 부문이 협력을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한일 협력 시대, 제조업을 놓고 경합하는 양국 경제의 윈윈전략은 실현 가능할까?

경제안전보장은 공급망 협력에서 출발

첫째,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미·중 경제 디커플링이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한일 기업은 미국이 주도하는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라는 다자간 협력 틀을 활용하여 글로벌 경제질서의 재편에 대응해야 한다. 2022년 9월 미국은 IPEF의 4대 협상 분야(pillar)로서 무역, 공급망, 청정에너지, 공정경제를 제시하였고 각각의 필러에서 참여국 간 협상을 진행 중이다. 미국은 2023년 2월 일본과 네덜란드의 반도체 제조장치 제조기업에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통제 동참을 요구하였고, 3월에는 미국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한국도 수출통제에 동참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 역시 경제안전보장 강화 관점에서 공급망 관리 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한일 정부는 지난 3월 17일 한일정상회담을 모멘텀 삼아 IPEF의 공급망 협력 분야에서 양국 기업이 윈윈할 수 있는 협력 의제를 발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때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미래 산업에 필수적인 중요 광물자원(예 망간, 니켈, 코발트, 리튬, 흑연, 희토류)의 공급망 안정화 차원에서 한일 기업이 제3국에서 협력하는 방안은 검토할 만한 의제로 판단된다.

디지털전환과 한국 기업의 일본시장 진출

둘째, 2000년대 초반부터 급진전되고 있는 일본 제조업의 갈라파고스화 현상은 향후 한일 기업의 국제분업 관계의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에 돌입하였고, 일본 경제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제조업마저 위기론이 확산되었다. 오가와 고이치(小川紘一) 당시 도쿄대학 교수는 1980년대 말 이후 세계 시장을 석권하였던 일본의 전자제품(액정패널, DVD 플레이어, 내비게이션, 태양전지)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20%대로 급락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일본 독자 기술로 개발한 일본 제품을 갈라파고스섬으로 회귀하는 조류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일본 제조업의 갈라파고스화 현상이 심각한 것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미래 산업에서도 일본 기업의 존재감이 엷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1988년 40.2%를 정점으로 1990년대 들어서부터 하락하기 시작하여 2021년에는 7.9%까지 하락하였다(그림 1). 일본 정부는 2021년 6월 대만 TSMC를 구마모토현에 유치하였고 2022년 8월에는 도요타자동차 등 8개 기업이 라피더스(Rapidus)라는 첨단 반도체 기업을 설립하는 등 1980년대 반도체 왕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중이다. 2019년 리튬이온전지의 공동 발명으로 요시노 아키라(吉野彰) 당시 아사히카세이 연구원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제조업 기술의 자긍심을 드높였던 배터리 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2016년만 하더라도 세계 차량용 배터리 산업에서 일본계 기업(파나소닉, AESC, LEJ)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3%에 달하였지만 2022년 상반기에는 9.6%(파나소닉)로 추락하였다(그림 2). 일본계 기업이 리튬이온전지를 둘러싼 국제 경쟁에서 중국과 한국 기업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장면이다. 전기차(EV)의 경우 2022년 1∼9월의 판매액 기준으로 세계 시장에서 현대차·기아는 미국 테슬라(Tesla), 중국 BYD·SAIC, 독일 폭스바겐그룹 다음으로 점유율이 높았다. 같은 기간 미국의 신차 판매실적을 보면 일본계 자동차의 점유율은 35~40%로 매우 높지만 전기차에 국한하면 10대 전기차 모델로 꼽힌 것은 없고 닛산 LEAF가 11위를 기록하였고 도요타 BZ4X는 26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 아이오닉5와 기아 EV6가 각각 7위, 8위를 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 제조업의 갈라파고스화 현상은 일본의 경제주체들이 디지털전환(DX)에 익숙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일본에는 미국의 GAFA(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중국의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와 같은 글로벌 디지털 플랫포머가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 IMD가 세계 63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디지털경쟁력 평가 결과에서도 한국은 12위, 일본은 28위를 기록하였다. 일본 정부는 '디지털패전(敗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디지털전환에 국력을 총결집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디지털전환은 한국 기업이 대일 진출을 통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호재임에 분명하다. 2011년 네이버가 일본 인터넷벤처 라이브도어를 인수하고 나서 출시한 모바일 메신저 라인(LINE)이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는가 하면, 2016년 6월 카카오 픽코마가 출시한 웹툰 픽코마가 최근 일본의 Z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18년 10월 삼성전자는 일본 NEC와 5G 통신장비 공동 개발에 합의하였고, 2022년 2월에는 현대자동차가 일본 전기차 시장 재진출을 발표하였다. 향후 한일 경제협력 패러다임이 일본 자본과 기술의 국내 유치에 역점을 두었던 과거의 경험을 뒤로하고, 경제적 원리에 입각한 기업 간 협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차세대 에너지기술의 공동 연구개발과 수소협력

셋째,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협력 분야는 차세대 에너지 기술의 공동 연구개발과 수소협력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기후변화 대응과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이라는 공통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 녹색성장이라는 정책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2021년 5월 일본 정부가 발표한 '그린성장전략'과 같은 해 12월 설치한 '그린이노베이션기금'의 차세대 에너지 기술의 연구개발 사업을 참조하여, 한일 기업 간 공동 연구개발이 가능한 분야를 모색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수소협력은 한일 양국이 에너지전환에 필수적인 재생에너지와 수소 도입에 지리적 제약이 지대하다는 공통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의 관심이 높은 분야이다. 한일 기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에너지·자원개발 분야를 중심으로 제3국 공동 진출 경험이 풍부하다. 최근에는 한일 기업의 수소·암모니아 분야 제3국 공동 진출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수소협력이 새로운 한일 협력 시대를 개척하는 선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