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보배는 그대의 목” 적장 탄복시킨 사명대사[이기환의 Hi-story](75)

2023. 3. 22.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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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약탈당했다가 사명대사(오른쪽)가 환수해온 석가모니 부처의 치아 진신사리. 사리 중 12과를 강원 고성 건봉사에 봉안해 두었다. / 건봉사·동화사 소장



얼마 전 문화재청이 강원 고성 건봉사터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 지정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합니다. 건봉사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 남쪽 끝인 향로봉 자락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520년 고구려 여인(고도령)과 중국 위나라 사신(아굴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한 ‘염불만일회’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기도 합니다. 758년 수행승 31인과 향도계원 1280명과 함께 1만일(27년 5개월) 동안 ‘아미타불’ 염불을 외는 의식을 벌였다죠. 1만일이 되던 787년 어느 날 아미타부처의 가호로 31인의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961인의 향도와 함께 극락세계로 왕생했답니다. 능파교(보물)와 불이문(문화재 자료) 같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있죠.

선조·광해군이 대를 이어 칭송한 스님 이 대목에서 저는 건봉사를 빛낸 인물에 주목합니다. 사명대사 유정(1544∼1610)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요.

1593년(선조 26) 4월 12일 선조가 흥미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공을 여러 번 세웠다. 그러나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대의 직함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특별히 파격적 상을 내려… 당상관(堂上官·정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1610년(광해군 2) 9월 28일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이 애도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산인(山人) 유정은 임진왜란 때 몸을 잊고 난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니 참으로 의승(義僧)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광해군일기>)

선조에 이어 광해군까지 사명대사를 극찬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1593년 4월 12일자 실록 기사의 말미에 단 사관의 촌평에 눈길이 머뭅니다.

“…전란을 당해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머지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선승의 참뜻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 그랬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명대사는 통곡합니다.

“국왕의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궁성이 텅 비고,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길 가운데서 헤맨다…. 초의(승려 자신)가 머리를 돌이키니 눈물이 그지없다.”(<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는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강원 고성 건봉사에 소장돼 있던 사명대사 관련 유물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와중에 융단폭격을 당해 소실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



“나라와 백성을 등지는 것이… 불자의 도리는 아니고, 산중에서… 마음을 닦는 선승의 참뜻은 결국 세상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분충서난록>)

대사는 건봉사에서 머물면서 “지금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울 때를 만나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고 설득하며 승병을 모았습니다.

사명대사는 그렇게 모집한 승병을 건봉사에서 훈련시킨 뒤 천릿길을 달려갑니다.(1592년 10월)

“왜적이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고 길가에 송장이 서로 베고 있네.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니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다. 미인(국왕)을 하늘 한끝에 바라보네.”(<사명당대사집>)

그래도 전쟁이 나자 줄행랑친 임금을 ‘미인’이라고 불러주었네요.

“10월… 의병이 건너가니… 칼집 속 보검은 밤중에도 울부짖네. 원컨대 왜병을 베어 성명에 보답코자….”(<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는 조련시킨 승병들을 거느리고 대동강 남쪽으로 건너가 왜적의 통로를 차단했습니다.

1593년(선조 26) 1월 벌어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명나라군과 함께 모란봉의 적진을 향해 진격해 적병 2000여명을 죽였습니다.(<건봉사 사적 비문>)

“내가 나서겠다”고 담판을 자처한 스님 전투뿐이 아니었습니다. 1594년(선조 27) 들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요.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 사이에 강화협상이 진행됐죠.

사명대사는 선조에게 “허락하신다면 다시 싸움터로 달려나가 왜적을 몰아낼 것이고, 혹시 강화회담에 나서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글을 올립니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서생포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진영에 들어가 4차례나 회담했습니다. 이때 왜가 명나라에 제안한 강화의 4가지 조건을 알게 됐는데요. 그것은 1)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2)예전처럼 교린할 것, 3)조선땅을 떼어줄 것, 4)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이었습니다. 사명대사는 펄쩍 뛰었습니다.

“…조선땅을 떼어 일본에 준다고? 일본이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조선의 땅을 짓밟아놓고…. 그런 마당에 땅을 떼어줄 리가 있는가…. 또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낸다? 이게 말이 되는가.”

가토 기요마사는 “명과 일본의 협상이 깨져 전쟁이 계속되면 조선 백성들은 한꺼번에 굶어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조선은 예와 의에 죽고 사는 나라다.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와 일본의 화약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버텼습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악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최근 사적으로 승격 지정된 고성 건봉사터. 한국전쟁 전까지는 642칸(속암 전각까지 766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거의 전부가 소실됐다. /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악귀’ 가토 기요마사까지도 존경한 스님 그런 가토도 당당한 사명대사의 태도에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가토는 “내가 함경도에 있을 때 ‘강원도 금강산에 귀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대사가 바로 그분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만나주니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가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답니다. 종이와 부채를 여럿 가지고 와서 사명대사의 글씨를 받아갔답니다.

사명대사는 가토에게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正其誼而 不謀其利…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고 써주었습니다. 다른 왜병들도 사명대사의 글을 받아가느라 줄을 섰답니다.

사명대사는 “조선과 명나라군이 합세했으니 너희 군사들쯤이야 잡담을 나누면서 막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4차 담판 일화가 백미입니다. 가토가 사명대사에게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명대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답니다. “우리나라엔 보배가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니까….”

가토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사명대사는 응수했습니다.

“오직 그대의 목이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 없이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해인사 사명대사 석장 비문>)

이를 두고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사명대사는 ‘조선이 그대의 목에 천근의 금과 1만 가구의 읍을 상으로 걸어놓았으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송운사적’)고 기록했습니다.

‘환속하면 장관시켜주마!’ 이와 같은 사명대사의 분투에 선조는 크게 감읍했습니다.

“스님인 유정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했고, 적진에서 적장과 담판을 짓고 있다. 후한 상급을 내려라.”(<분충서난록>)

선조는 그러면서 “형세가 어려운 지금 그대가 환속한다면 지방장관의 중임을 맡겨 장수로 삼을 텐데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얼마나 형세가 급급했으면 사명대사 같은 고승에게 그와 같은 염치없는 부탁을 했겠습니까.

선조는 위급할 때마다 사명대사를 찾습니다. 강화조약 결렬로 1597년(선조 30) 1~2월 사이 왜군이 재침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유정(사명대사)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비록 중이지만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을 영남으로 내려보내… 승군을 거느리게 하고….”(<선조실록> 1596년 12월 5일)

사명대사를 향한 선조의 무한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쟁 후에도 사명대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울산 서생포에 주둔한 적진으로 들어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인다. 이때 사명대사는 조선땅을 떼어줄 것과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 왜군이 명나라에 제시한 4가지 강화조건을 알게 된다. 사명대사는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의 강화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버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04년(선조 37) 왜국 사신이 갑자기 조선을 방문하자 조정이 우왕좌왕합니다. 그때 국정최고기구인 비변사가 “빨리 유정에게 역마(驛馬)를 보내 불러들이자”고 건의합니다. 실록 기사를 쓴 사관이 혀를 끌끌 찹니다.

“세상에 조정에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 적의 사신이 오자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찮은 중(사명대사)의 손에 맡기는가…. 나랏일을 도모할 자가 유정 한 사람뿐이라니 아, 마음 아프다.”(<선조실록> 1604년 2월 24일)

‘뼈 때린 팩폭, 세상에 사명대사뿐!’ 사관의 한탄은 ‘뼈 때리는 팩폭’이었습니다.

“유정(사명대사)이 왕년에 여러 차례 가토(기요마사)의 진영에 드나들며 가토와 협상을 벌일 때 큰소리를 치며 굴하지 않았습니다. 가토가 이를 매우 좋게 여겨 유정의 사람됨을 일본인에게 칭찬했기 때문에….”(<선조실록> 1604년 3월 14일)

비변사는 “유정이 일본에 간다면 고승으로 지목돼 왜인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전후 처리’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적지로 떠납니다.(1604년 6월 22일)

일본인들은 도쿄(東京)를 방문한 사명대사를 보자 “저 스님이 설보화상이다”라고 환영했습니다. ‘설보화상’이란 사명대사가 일본 진영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죠.

일본인들은 ‘보배를 그렇게 멋지게 설명한 스님이 어디 있냐’고 우러러본 거죠. 사명대사는 일본의 유력인사 및 고승들과 교유했습니다. 사명대사는 마침내 1605년(선조 38) 3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성립시켜 조선의 근심을 없앴습니다.

특히 일본에 잡혀갔던 3000여명의 포로와 약탈해간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도 환수해왔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을 방문한 사명대사의 글과 글씨를 받으려고 일본의 승려와 유명인사들이 줄을 섰다. 사진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한 일본 교토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쪽같이 사라진 진신사리 대사가 환수해온 진신사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불두골(머리뼈)과 불아(치아) 등 불사리 100과와 석가모니 부처가 입었다는 비라금점(붉은 비단에 금점을 찍은 가사) 한 벌을 가져왔는데요. 가져온 진신사리는 셋으로 나눠 황룡사 탑,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의 계단(戒壇·계를 수여하는 단)에 두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양산 통도사에 난입해 사리를 탈취해갔습니다. 1605년 약탈 사리를 환수한 사명대사는 전란의 재발을 우려해 100과 중 12과를 빼서 승군을 일으킨 건봉사 낙서암(사명대사 본사)에 봉안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도굴의 화를 입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1986년 6월 10일 민통선 이북지역이라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해 치아사리 12과를 훔쳐갔습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부터 모든 도굴꾼의 꿈에 연일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었다는 겁니다. 불안해진 일당은 한 달여 만에 서울의 한 호텔에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습니다.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안타깝게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합니다.

무차별 폭격에 초토화된 건봉사 건봉사의 수난사 중에 한국전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1년 5월 10일 유엔군이 후퇴하던 공산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과 함포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이 불탔고요.

이때 국보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소실됐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죠. 전선이 고착화하자 건봉사 지역은 휴전 때(1953년 7월 27일)까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 됩니다.

휴전 직전까지 벌어진 16차례의 공방전에서 수십만 발의 포탄이 떨어져 그야말로 초토화됩니다.

전쟁 직전 642칸 규모의 건봉사가 사실상 사라진 겁니다. 지금 남은 건봉사는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은 건봉사의 역사가 재건된 사찰입니다. 새삼 ‘네 머리가 조선의 보배’라 일갈한 사명대사의 한마디가 떠오르는군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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