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슬픔과 노여움이 반복되지 않기를

최명국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2023. 3. 2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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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애송시 중 하나이기도 한 위의 시는 '러시아의 국민 시인',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평가를 받는 푸시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1799-1837)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일부이다.

이 시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중역되어 소개된 이후 오랫동안 한국인의 애송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굴곡진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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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국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거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되리니"

한국인의 애송시 중 하나이기도 한 위의 시는 '러시아의 국민 시인',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평가를 받는 푸시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1799-1837)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일부이다. 이 시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중역되어 소개된 이후 오랫동안 한국인의 애송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굴곡진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국권상실, 전쟁과 분단, 이산, 독재 정권 등과 같은 험하디 험한 세파(世波)를 견뎌내야 했던, 또 그 속을 부유(浮游)해야 했던 슬프고 노여웠던 한국인들의 삶을 너무나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면 가혹한 발길질 같은 현실로 인해, 또 의도치 않은 삶의 굴곡으로 인해 시인의 표현처럼 슬프거나 노여울 때가 있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나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등은 많은 사람들을 노엽게, 또 슬프게 한다.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상처 입은, 또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를 시와 연관 짓는 것이 저어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즐거운 날'이 그들에게 빨리 '오고야 말'았으면 하는 바람만은 간절하다.

그런데 불가항력적인 상황들을 논외로 하면 '삶'이 개인을 슬프고 노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속이고 노엽게 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 것 같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 '덕분'이거나, 혹은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를 슬프거나 노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나 때문일 것이며, 반대로 현재의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은 '참고 견딘' 과거의 나 덕분일 것이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나가 '덕분'이 아닌 '때문'이라면 진지하게 성찰하고 진심으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를 덕분으로 여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최근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에서 학교폭력을 주도한 가해자의 이름이 유행어가 되고 있다. '연진아!'로 시작해 논란이 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풍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덕분에 학교폭력과 관련된 세간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세상의 많은 연진이들이 SNS를 탈퇴하거나, 개명은 물론이고 성형수술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과거의 나에 대한 세탁을 시도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피해자들과 자신의 과거와 현재 삶을 속이는 옹졸한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기만이 결코 과거의 행위들을 '지나가 버린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연진이들보다 우리 사회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들은 무관심과 소외 때문에 '참고 견'뎌야만 했던, 그러나 현재도 여전히 즐겁거나 기쁘지 않은 학교 폭력 피해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학교 폭력 가해자들을 징지(懲止)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상처와 아픔이 재생되거나 반복되지 않게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들을 징지한다는 명분으로, 또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현재가 노출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과거의 무관심과 소외만큼이나 현재의 과도한 관심이 그들에게 또 다른 슬픔과 노여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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