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화엄사 홍, 백매화 가연(佳緣)의 가르침에 따라

정일근 시인·경남대 석좌교수 2023. 3. 2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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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인·경남대 석좌교수

하마 구례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화에 장엄했던 꽃잎이 날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지난 주말, 만개의 시간이 지났으니 그 무수한 꽃은 찾아온 곳에서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요. 눈을 감으면 제 앞으로 화엄사 홍매화 나무 우뚝 솟아오릅니다. 돌아보면 바람에 날리는 고혹적인 향기가 와락 밀려옵니다. 이 나이를 살면서 꽃나무와 만난 최고의 가연(佳緣)이 3월의 화엄사에 있었습니다.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바위를 뚫는/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山門(산문)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하늘의 雲板(운판)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화엄사 행을 준비하면서 저는 1993년 제7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김명인 시인의 ‘화엄에 오르다’를 찾아 읽고 읽었습니다.

아마 이 시를 처음 만난 그때부터 ‘화엄(華嚴)’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화엄은 ‘불법(佛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왜 그리 화엄이란 말이 젊은 시인이었던 저에게 그리 좋았던지요. 화엄이란 말에서 제 살과 뼈를 활활 태우는 듯한 뜨거운 열기를 느꼈습니다.

화엄사 가는 길은 화엄으로 가는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동에서부터 섬진강 거슬러 오다가 지리산 남쪽 기슭에서 삼국시대 승려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화엄사를 만납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지요. 화엄사 홍매화를 찾아 나선 대중들과 가다 서기를 되풀이하다 화엄사 산문 앞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며 옷매무시를 단정히 합니다.

화엄사를 두고 홍매화만 이야기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이 나라 화엄 도량의 정수에 핀 매화나무는 두 그루가 있습니다. 하나는 각황전 옆 홍매화입니다.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나무 높이가 9m에 이르니 가히 이 봄 많이 만났던 홍매화 중 으뜸입니다. 나무의 자태며 꽃의 색깔 또한 붉디붉습니다.

한학자인, 생의 도반인 최한선 시인은 그러한 붉음으로 홍매가 아니라 ‘화엄사 흑매(黑梅)’라고 이름합니다. 춥고 긴 겨울을 이기고 피우는 매화이기에 화사한 분홍은 홍(紅)이고, 무거운 홍은 흑으로 비유되나 봅니다. 그래서 화엄사에서 홍매는 검붉다는 흑매가 됩니다. 그 흑매가 피는 자리가 각황전 옆인데, 각황(覺皇)이 깨달음의 가장 높은 위치를 뜻하며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니 저에게 이 나무는 각황전 부처를 모시는 협시보살로 읽힙니다.

화엄사가 숨겨둔 또 하나의 매화는 화엄사 밖, 원통전 뒤편에 서 있는 야매(野梅), 즉 들매인 백매화입니다. 이미 홍매의 장엄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놓치기 쉬운 장관이 그곳에 있습니다. 수령이 6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귀한 나무입니다. 화엄사는 이 봄 홍매화 백매화 두 그루의 만개로 화엄경을 설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화엄경의 원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이고 화엄사를 일러 대화엄사라 부르는 이유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문화재청은 2007년부터 우리나라 4대 매화를 천연기념물로 정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순천 선암사 ‘선암매’ 장성 백암사 ‘고불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와 더불어 구례 화엄사 ‘들매’가 그러합니다. 해마다 꽃을 피우는 이유를 쉽게 자연의 섭리라 말하지만, 어찌 그 섭리만으로 화엄사에 매화가 피는 까닭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화엄이란 석가부처가 깨달음에 이른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경문이며,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닦아 장엄하게 한 것이니 화엄사 안과 밖의 두 그루 매화나무 역시 부처의 행과 덕이며 장엄한 가르침입니다. 생각이 그곳에 이르니 꽃나무 아래 2박 3일은 저에게 귀한 깨달음의 시간이었습니다. 화엄사에 다녀왔으니 꽃이 지고 잎이 나는 사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아니지만, 법구경의 가르침인 ‘불견(不見) 불문(不聞) 불언(不言)’이언정 실천할 작정입니다. 단기 출가하듯이 작은 실천에 정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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