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율의 세상 돋보기]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경기일보 2023. 3. 2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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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성서 요한복음의 한 단락이다. 이른바 이적(異跡)을 드러내는 구절로 어린 시절 성서를 접했을 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구절이기도 하다. 상식의 견지에서 보자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여태껏 문자주의로 통칭되는 일각에서는 곧이곧대로 일점일획 의심 없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자리에서 현대의학에 호소해 기술된 내용의 진위를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런데 위 단락을 거꾸로 읽어 나가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한마디에 자리를 툴툴 털고 누군가 걸어 나간 것을 곧이곧대로 일단 믿어 보자. 그렇게 되면 ‘기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있을 수 있는 한 가지 추정이 보다 더 선명해진다. 애초에 ‘병자’는 가짜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벳자타라고 불리는 연못가에 있는 ‘눈 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은 볼 수 있고 들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이야기 자체에 온전히 비유를 담은 것은 아닐까? ‘건강하게 돼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이’는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이를 일컫고, ‘눈 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은 스스로 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들지 않으며 걷지 않는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병자 모두 스스로 볼 수 있고 자신의 힘으로 들고 걸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결국 사실로든 비유로든 벳자타 연못가에서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려(외부에서 어떤 혜택이 오기를 기다려)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병자들’에게 예수가 한 일이라고는 (네 안에 그 능력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는 이에게) “네 스스로 하라”는 냉정한 한마디다.

이제 2023년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혹시 볼 수 있는 이들이 보지 않고, 들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들지 않고 걷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김경율 회계사·경제민주주의21 공동대표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근로소득자의 면세점을 낮추는 세법 개정이 있었다. 소득세 특별공제 항목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것으로 동일한 금액을 가정했을 때 저소득자가 이에 따라 10%에 못 미치는 세 부담이 생긴다면 고소득자는 40%를 넘는 세 부담이 야기되는 조처였다. 매우 바람직한 조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초 연말정산 과정에서 본인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자 이내 곧 불만이 폭발했다. 당시 정부는 이에 못 이겨 급기야 소급 적용하는 보완조처를 발표했다. 이로 말미암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라는 근로소득자 면세자 비율은 2013년 기준 31.3%였다가 2014년 48.1%로 비약적으로 뛰게 된다. 한편의 코미디였다.

이런 일이 벌써 10년이 다 돼가는 과거의 일일까? 비근하게 ‘보조금’에 관해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지켜보면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시민단체라고 하면 자주적으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감시하기 위한 기관으로 재정적으로도 독립해야 함에도 보조금이 끊겼다며 시위하는 광경은 참으로 살풍경하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시민사회의 토양이 척박한 곳에서는 국가기관 혹은 재단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감시받고 견제받아야 할 기관과의 관계 맺기는 일시적이고 조건적이어야 한다. 이 같은 모습은 자칭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데칼코마니처럼 양쪽의 똑같은 말과 행동이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한다. 종교단체에도 과세권이 부여될 것을 주장하던 이가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도 종교단체와 같은 특권을 달라 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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