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심장 펄떡이고 눈 치켜떴는데…잠자리애벌레의 잔혹만찬

정지섭 기자 입력 2023. 3. 22.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잠자리 유충 학배기, 아랫입술 뻗어 올챙이 등 먹잇감 사냥
알에서 부화한 올챙이의 가장 무서운 천적
최대 몇년까지도 물에 살다가 불완전 변태

수요동물원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65

지난해 청와대 개방과 함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속살을 드러낸 북악산에선 이곳저곳에서 생명이 움트는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양도성 백악구간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내려오다 만나는 쉼터의 물웅덩이에는 새봄의 전령인 개구리알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부화를 앞두고 있죠. 눈에 보일락말락한 새끼들이 꼬물거리며 태어난 뒤 본격적으로 올챙이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이 소중한 생명들이 단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모두 개구리로 자라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한배에서 나온 동기들과 먹이 경쟁을 해야하고, 때로는 자신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천적들의 추격을 떨쳐내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극소수만이 개구리가 돼 대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올챙이를 노리는 천적은 헤아릴 수 없기 많지만, 그 중 가장 무서운 놈을 꼽으라면 단연 원탑은 학배기입니다.

/firefly403 Youtube 캡처 잠자리 애벌레인 학배기가 막 사냥한 올챙이의 몸속에 아랫입술을 꽂아넣고 포식하고 있다.

곤충의 애벌레 중에는 남다른 습성과 외모로 별도의 이름을 갖고 있는 종류가 더러 있습니다. 하수구의 제왕 장구벌레는 모기 애벌레입니다. 사체와 배설물을 터전으로 삼는 더러움의 화신 구더기는 파리 애벌레고요. 길게는 십수년씩 땅속에서 사는 참을성의 상징 굼벵이는 매미 애벌레죠. 잠자리 애벌레도 별도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학배기입니다. 수채라고도 하죠. 그런데 이 학배기는 사냥솜씨와 잔혹한 식습성으로 그 어느 곤충의 애벌레들을 압도합니다.

/Firefly403 Youtube Capture 채 3분이 되지 않아 학배기에게 포식당한 올챙이의 몸뚱아리가 일부 잔해만 남아있다. 이 상황에서도 눈과 심장 등은 움직이고 있었다.

잠자리 성충 자체도 압도적인 기량을 가진 사냥꾼입니다. 학배기는 어떤 종류의 잠자리인지에 따라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간을 물속에서 보내는데요. 이 때 사냥꾼으로서의 카리스마는 어른인 잠자리를 멀찍이 능가합니다. 학배기에게는 어떤 곤충·애벌레에게도 없는 필살기의 무기가 있는데 바로 아랫입술입니다. 레이비엄(labium), 혹은 죽음의 입술이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평소에는 착 접혀있다가 먹이를 사냥할 때 순식간에 뻗습니다. 니은자 형태로 뻗었다 다시 수평으로 펴지는 이 입술의 양 끝은 갈고리로 돼있습니다. 포인트만 잘 잡으면 먹잇감이 벗어날 재간이 없는 거죠.

/동아출판사 '세계의 동물' 학배기가 먹이를 사냥할 때 접혀있던 아랫입술을 쭉 뻗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이 죽음의 입술을 갖고 있기에 학배는 물속에서 장구벌레 등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다른 먹잇감은 물론 훨씬 큼지막한 먹잇감도 잡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올챙이입니다. 사실 올챙이들은 안 그래도 물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물장군·장구애비·게아재비 등 수서곤충들의 공격에 일상다반사로 노출돼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물벌레의 사냥장면이라도 학배기의 식사모습이 더욱 끔찍한 까닭이 있습니다. 물장군 등이 몸속에 주둥이를 꽂고 체액을 빨아들이는 반면, 학배기는 버둥거리는 먹잇감을 하나도 남김없이 씹어먹습니다. 그것도 산채로요. 죽음의 입술을 뻗어 잡은 큼지막한 올챙이를 포식하는 동영상(firefly403 Youtube) 한 편 보실까요?

죽음의 입술을 내뻗은 학배기가 올챙이를 산채로 먹어치우기 시작합니다. 가련한 올챙이는 알에서 부화한 뒤 제법 돼 곧 뒷다리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게 자라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는 꼬물꼬물한 뒷다리가 나왔어야 할 배설구와 등쪽을 뚫은 공포의 아랫입술은 건강히 무럭무럭 자라던 올챙이의 내장과 호흡기관들을 휘뒤집어놓으면서 무자비하게 흡입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피인지 체액인지 알 수 없는 시꺼먼 액체가 모락모락 흘러나오면서 죽음의 향기로 물속을 수놓습니다. 이 올챙이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로 향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는지 올챙이는 여전히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입을 조물거리고 아가미로 펄떡펄떡 숨을 쉽니다. 최후의 몸부림은 이렇게 사뭇 다른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정지섭 기자 올봄 북악산의 한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개구리알.

먹잇감으로 씹혀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가련한 올챙이의 심장은 최후의 순간까지 펄떡이고 있었습니다. 3분여 시간이 지난뒤 올챙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나머지 껍데기만 널브러져있습니다. 그 널브러진 잔해 속에 올챙이는 여전히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습니다. 심장도, 내장도,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모두 학배기의 뱃속으로 쓸려들어갔지만, 여전히 의식만은 또렷한 셈이죠. 하지만 학배기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죽음의 잔해더미에 새로운 식욕을 느꼈는지 그마저도 빛의 속도로 먹어치웁니다. 불완전 변태로 어른 잠자리가 되면 또 자신만의 비행술로 날벌레들을 사낭하겠지만, 학배기는 오히려 성체보다 더 효율적이고 잔혹한 사냥들로 철없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정지섭 기자 올봄 북악산의 물웅덩이에 개구리들이 낳아놓은 알.

이제 볕이 따뜻해지면 북악산 웅덩이는 올챙이들로 우글댈 것입니다. 학배기들의 먹이활동도 더욱 분주해지겠죠. 모쪼록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다만 올챙이들이 위기와 난관을 뚫고 강력한 어른 개구리로 자라난다면, 한때 천적이었던 학배기의 성체인 잠자리를 잡아먹는 복수혈전이 성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태계의 구성원 누구를 편들 수 없는 것, 살아남는자만이 강한 것, 그게 바로 자연이라는 심판진의 작동 원리입니다.

수요동물원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65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