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24시] 학폭, 차가운 복수는 어떤가

이효석 기자(thehyo@mk.co.kr) 입력 2023. 3. 21. 17:18 수정 2023. 3. 2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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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빅쇼트'같이 잘 만들어진 경제 영화 한 편이 한국에서도 나오는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영화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IMF 외환위기의 복잡다단한 원인을 몇몇 부패한 경제 관료나, 국가 위기에 한탕을 꿈꾸는 탐욕스러운 투기꾼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박한 평가에 공감했다. '한국 영화는 냉정하다고 느낄 만큼의 차가운 영화를 만드는 데 아직은 서툴다.'

뜨거운 복수를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며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드라마는 학교폭력(학폭)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고, 가해자들은 또 얼마나 악마 같은지 선명하게 다루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가해자의 악마성을 부각하다 보니, 그래서 실제로 그들이 악마로 보이기 시작하니, 의문이 남았다. 이런 악마에 대해선 어떤 해법이 있을까 하는 회의 말이다. 현실 같기만 했던 드라마에서 어느 순간 비현실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가해 학생의 엄마를 경험한 후 책을 내고 상담사로 활동하는 정승훈 씨를 만나 인터뷰하기로 했다. 악마가 아닌 실제 존재하는 우리 주변의 가해자를 만나 현실적 해법을 찾고 싶어서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많이 배웠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들이 그래도 아직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다는 것과 그래서 사과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 가해 학생을 단죄함과 동시에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에 힘써야 한다는 것, 최근 학폭은 신고조차 하기 어려운 '사이버 폭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

모두가 정교한 해법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에 맞는 해법은 뜨거운 복수심이 아닌 차가운 이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상대와의 소통의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핀란드 청소년들은 1년에 20시간씩 '키바' 교육을 받는다. 역할극을 통해 왕따 역할을 맡은 후 간접적으로 학폭을 경험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따돌림을 받는 학생을 도울 방법과 왕따를 근절시킬 방법을 찾는다. 역지사지의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학폭이 얼마나 무서운지 차가운 이성으로 이해한다. 학폭을 막을 복수가 꼭 뜨거울 필요는 없는 셈이다.

[이효석 오피니언부 thehyo@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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