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나의 안목

2023. 3. 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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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막고 바람을 피하려 걸치게 된 '옷'이지만 사람들은 예쁘게 입고 멋을 내는 것을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은 옷이 날개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단순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단순한 색상의 옷을 좋아한다. 물론 화려한 디자인에 다양한 색상도 아름답지만, 단순한 담담함에 마음이 더 간다. 예컨대 위아래 한 가지 색상 정장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기품도 있고 멋있다고 생각한다. 젊었을 때 아내에게도 가능하면 그런 옷들을 권하곤 했다. 위아래 한 가지 또는 각각 한 가지 색의 옷을 깔끔하게 입으면 무언가 빛이 나고 프로의 느낌이 났다.

얼마 전 지하철 환승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려고 인파 속을 밀려서 움직이고 있을 때 그런 옷을 발견했다. 멀리 보이는 환승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걷고 있는데, 20여 m 앞 단색 정장의 여성 뒷모습이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회색 계통의 색상이었는데 엄밀하게는 초록색도 살짝 들어간 것 같고 노란색·붉은색도 감도는 오묘한 옷이었다. '와! 바로 저런 옷이다. 어디서 저런 옷을 사는 거지?' 멀찌감치 앞에 걷기에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 옷 주인의 안목에 감탄했다.

잘 기억했다가 아내에게 저런 옷을 하나 사줘야겠다고 되뇌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인파가 오른쪽으로 밀렸다. 앞이 막힌 듯 걷는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웬일이지 하고 살펴보니 왼편 앞쪽 천장이 약간 처져 있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물을 피해 걷느라 통로가 좁아졌던 것이다. 천장 아래 바닥을 보니 신문지가 몇 장 젖은 채 깔려 있고 누수를 받아내는 플라스틱 양동이 두 개가 처량하게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지저분하게 놓여 있는 양동이 색깔이 그녀의 옷 색깔과 똑같은 것 아닌가? 눈을 의심하면서 나도 모르게 양동이와 그녀의 옷을 번갈아 쳐다봤다. '같으면 안 돼'라는 실낱같은 희망 속에 비교했지만 99%가 아니라 100% 일치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신비하게 보였던 그 색이 흔하디흔한 회색의 일종이었다는 깨우침이 다가왔다.

갑자기 존경해(?) 마지않던 그녀의 옷이 흉해졌다. 천박하고 싸구려로 보였다. 은은하고 기품 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패션 감각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생각됐다. '내가 뭐를 보고 있었던 거지? 아니다! 양동이는 양동이고 그녀의 옷은 여전히 멋있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뭐 때문에 잠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언가 무너져 버린 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예쁜 회색 옷이나 말없이 걷는 그녀도 그리고 양동이도 아무 잘못이 없다.

자기 딴에 안목이란 이거다! 고상한 것은 이거다! 고집스럽던 필자의 눈이 잘못된 것뿐이다. 살면서, '옷' 색깔만 잘못 봤다면 다행이겠다!

[장동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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