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법원은 ‘영장 자판기’인가 / 박용현
[아침햇발]
박용현 | 논설위원
바야흐로 압수수색의 시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떤 날은 하루에도 여러 건씩 압수수색 소식이 들려온다. 통계적으로도 압수수색영장 청구는 2011년 10만여건에서 2022년 39만여건으로 늘었다. 현 정부 들어선 정치적 색채를 띤 사건들에서 압수수색이 부쩍 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게 경기도청 압수수색이다. 김동연 지사는 지난 16일 에스엔에스에서 “검찰이 3주(22일) 동안 92개의 피시와 11개의 캐비닛을 열고 6만3842개의 문서를 가져갔다”고 했다. 경기도는 김 지사 취임 뒤 여덟달 동안 전임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수사로 13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했다고 한다. 압수수색의 새로운 진화를 보는 듯하다. ‘K-압수수색’이라고 전세계에 알려도 될 만한 일이다. 일반 영장과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 국가권력이 어디든 치고 들어가 무제한 압수수색할 수 있었던 ‘일반 영장’의 야만성을 이성의 통제 아래 가두고자 한 게 현대 영장주의 원칙이다.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돌아볼 때가 됐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김 지사의 컴퓨터까지 압수수색당한 장면이 상징적이다. 수사 대상자인 이 전 부지사는 2020년 1월 퇴직했고, 김 지사는 2022년 7월 취임했다. 그사이 도청도 이전했고, 새 지사의 컴퓨터도 새로 설치했다. 김 지사 컴퓨터는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경기도 대변인은 “압수수색은 15분여 만에 종료됐는데 검찰이 단 한 개의 파일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했다.
형사소송법 원칙이 지켜졌는지 의문이다. 압수수색은 해당 장소에 “압수할 물건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할 수 있다. 피의자가 아닌 제3자의 경우 이 조건이 더욱 엄격하게 요구된다. 그런데 압수수색영장 심사 과정에서 김 지사 컴퓨터에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한 어떤 물건(파일)이 있을 것이라는 소명이 이뤄졌을까. 상식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실제 압수된 파일도 없었다. 검찰은 “경기도가 이재명 지사가 쓰던 피시를 폐기했다고만 할 뿐 기록이나 근거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압수영장을 집행했다”고 해명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다짜고짜 현 지사의 새 컴퓨터를 뒤질 게 아니라 전 지사가 쓰던 컴퓨터를 찾아내 압수수색하는 게 상식에 맞지 않을까.
김 지사는 “압수수색영장은 자판기가 아니다”라며 “(검찰이 주인인) ‘검(檢)주국가’의 실체를 똑똑히 봤다”고 비판했다. “법치라는 이름을 내세운 새로운 형식의 독재 시대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도 했다.
‘영장 자판기’라는 말은 법원으로선 가장 치욕적인 비칭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런 표현이 낯설지 않게 된 현실은 그만큼 영장심사의 엄격성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는 반증이다. 이런 점에서 대법원이 압수수색영장 심사 과정에서 수사기관 관계자나 제보자 등을 불러 의문스러운 사항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국민의 불신을 더는 한 걸음이 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를 압수수색할 때 사용할 검색어를 영장에 기재하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전인격이 고스란히 담긴 휴대전화를 비롯한 디지털 정보를 검색어 제한 없이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현대판 일반 영장에 다름 아니다.
구속영장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형사절차 단계별로 요구되는 혐의의 입증 정도는 ‘수사 개시(단순한 혐의)<기소(충분한 혐의)<구속(현저한 혐의)<유죄판결(확신)’로 요약된다(이주원 <형사소송법>). 구속을 위해선 매우 높은 유죄의 가능성이 입증돼야 한다는 것인데, 2015년부터 2020년 6월까지 5년 반 동안 구속됐다가 무죄로 풀려난 사람이 905명에 이른다(최기상 민주당 의원, 대법원 제출 자료). 법원이 구속영장을 심사할 때 혐의 입증 정도와 구속 필요성을 더욱 엄격히 따져야 함을 보여준다.
최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출국금지 사건, 윤미향 의원 사건 등이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검찰이 씌운 거짓 프레임을 깨뜨린 것은 법원이 객관적 심판관으로서 제 역할을 한 사례다. 그러나 최종 판결은 물론 압수수색·구속영장 단계에서부터 사법통제 기능을 더욱 철저히 수행해야만 폭주하는 ‘검주국가’에서 법치가 그나마 숨쉴 수 있을 것이다. 검찰이 무죄추정 원칙,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무력화시키며 여론몰이 수사로 누군가를 제물로 만들 때 인권과 정의의 잣대로 수사권 남용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유일한 국가기구가 법원이기 때문이다.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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