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응급피임약, 가톨릭계 병원에서는 처방 안 한다?

우혜림 2023. 3. 2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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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에 '응급피임약 필요할 때 가톨릭병원 응급실 가지 말라' 게시물
실제 가톨릭의료협회 회원 산부인과 22곳 중 19곳이 응급피임약 처방 안 해
국내선 응급피임약 먹으려면 의사 처방 필요…WHO는 "모든 여성에게 안전"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우혜림 인턴기자 =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응급피임약 필요할 때 가톨릭 병원 응급실은 가지 마세요'란 글이 올라와 많은 관심을 끌었다.

"가톨릭 계열 병원은 종교적 이유로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으니 응급피임약을 받아야 할 때는 (이런 병원에) 가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도 많이 퍼졌다.

응급피임약은 흔히 '사후 피임약'으로 불리는 약품으로, 성관계 후에도 복용하면 피임 효과를 볼 수 있다. 다만 성관계 뒤 72시간(3일) 이내에 복용해야 효과가 있다. 국내에서 응급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지정돼 있어 반드시 의료인으로부터 처방받아야 복용할 수 있다.

가톨릭계 병원에선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사실일까? 그렇다면 이런 처방 거부가 법에 저촉되지는 않을까?

경구피임약 [연합뉴스TV 제공]

국내 최대 가톨릭 계열 의료법인인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중앙의료원(이하 가톨릭중앙의료원)에 확인한 결과 실제 산하 부속 병원에서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톨릭중앙의료원은 서울성모병원, 부천성모병원 등 전국 주요 도시 8곳에서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 8개를 운영 중인데, 이 의료법인의 윤리헌장에 이런 내용이 반영돼 있다.

윤리헌장을 보면 "출산 조절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자연 출산 조절을 제외한 그 어떤 피임 방법도 제공하거나 권장하지 않으며, 인공피임 시술이나 낙태약으로 분류되는 응급피임약 역시 같은 이유로 허용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는 임신중지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가톨릭의 교리를 반영한 것이다. 가톨릭은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생명이 생긴 것으로 보고 이를 철저히 보호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중앙의료원 윤리헌장 [출처=가톨릭중앙의료원 윤리헌장. 재판매 및 DB 금지]

가톨릭중앙의료원 관계자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가톨릭중앙의료원과 그 산하 병원 모두 윤리헌장을 따라 사후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다"라며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1차 병원(의원이나 보건소)의 진단서가 필요한 종합병원이기 때문에 처방받기까지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응급피임약을 급하게 복용해야 하는 환자들이 굳이 대형병원으로 찾아오는 경우는 적거나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가톨릭중앙의료원 소속이 아닌 다른 가톨릭 계열 병원들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산하 조직인 한국가톨릭의료협회는 전국 39개 가톨릭 병·의원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데 이 가운데 산부인과 진료가 가능한 곳은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병원 8곳을 포함해 총 22개다.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병원을 제외한 14곳에 응급피임약 처방이 가능한지 문의한 결과 3곳을 제외한 11곳이 모두 "응급피임약 처방은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가톨릭을 표방한 모든 병원이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이나 '성'(聖), '바오로', '요한' 같은 명칭이 들어간 병·의원에선 응급피임약을 처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응급피임약의 종류 [출처=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홈페이지. 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응급피임약 처방을 거부하는 행위가 위법은 아닐까?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들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나 조산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의료법상 진료 거부 금지는 의사가 진료 자체를 거부할 때 적용되는 조항에 가깝다"며 "의사가 부재중이거나 진료를 행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항, 의료기관에서 할 수 없는 의료기술에 관한 사항 등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나, 진료 후 의료적인 판단에 따라 약 처방을 하지 않는 것은 진료 거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임상적 판단이나 의료적인 사유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념을 사유로 진료 및 처방을 거부하는 것은 의료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응급피임약은 그동안 의사의 진료와 처방이 필요 없는 '일반의약품'으로 재분류해야 한다는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여성계 등에선 응급피임약은 긴급하게 복용해야 하므로 처방 같은 절차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실제 응급피임약의 피임 효과는 성관계 후 24시간 이내 복용 시 95%, 72시간 이내엔 58% 정도로 알려져 있다. 피임을 원한다면 최대한 빨리 먹으라고 권고하는 이유다.

정부도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려 나선 적이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 이하 식약처)는 2012년 6월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피임약 재분류안'을 발표했다. 일반의약품으로 규정해온 사전피임약(경구피임약)은 부작용 관리를 위해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고 응급피임약은 청소년만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 주요 안건이었다.

응급피임약이 "부작용 발현 양상 등에 특이사항이 없고 국내외에서 장기간 사용돼"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해도 무방하다는 게 식약처 입장이었다.

응급의료센터 병원 응급실 [연합뉴스TV 캡처]

그러나 한국천주교주교회의생명운동본부,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의회 등 종교계와 의사협회(대한산부인과협회, 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 대한의사협회)는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응급피임약은 수정된 난자가 자궁내막에 착상되는 것을 막는 낙태약으로, 이를 오·남용하면 부작용이 심각해 국민 건강에 피해가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응급피임약의 편리한 사용 증가는 사전피임약 복용 소홀로 이어져 무책임한 성문화가 확산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응급피임약은 성분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자궁경부(자궁의 입구)의 점액을 끈끈하게 해 정자가 이동하기 어렵게 만드는 '레보노르게스트렐'과, 난자의 배란을 억제·지연시키고 수정란의 착상을 저해하거나, 드물게 착상된 수정란을 파괴하기도 하는 '울리프리스탈'이 그것이다.

의학계에선 이런 응급피임약이 생리불순, 생리 시 비정상적인 출혈, 두통, 현기증, 구역, 복통, 설사, 구토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결국 식약처는 그해 8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과학적으로는 사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긴급피임약(응급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나 그간의 사용 관행 등을 고려해 현 분류 체계를 유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의 경우 응급피임약을 필요한 모든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미리 제공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WHO의 '가족 계획 핸드북'(Family Planning : Global handbook for providers, 2018) 책자를 보면 응급피임약은 "난소에서 난자가 배출되는 배란 작용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원리"로 작동해 수정란이 착상된 이후에는 약 효력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낙태약과는 다르다고 설명돼 있다. 또 피임에 실패하더라도 태아나 이후 임신 능력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같은 생리 주기라도 한 번 이상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응급피임약의 효과 세계보건기구(WHO) <가족 계획 핸드북>(Family Planning : Global handbook for providers, 2018) 중 일부. '100명이 생리 시작 2∼3주에 피임 없는 성관계를 했을 경우 응급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8명, 울리프리스탈 응급피임약 복용 시 1명 미만, 레보노르게스트렐 응급피임약 복용 시 1명이 임신한다고 돼 있다. [출처=WHO 홈페이지?? 재판매 및 DB 금지]

WHO는 또 같은 책자에서 "응급피임약은 모든 여성에게 안전하고 적합하다"며 "가능하다면 응급피임약이 필요할 수 있는 모든 여성에게 미리 약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캐나다, 중국, 인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또는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응급피임약 이용이 활발해지면 사전피임약의 사용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를 반증하는 연구도 있다. 한국간호과학회가 발행한 논문 '응급피임약 사전 제공이 청소년의 성(性)과 피임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2018)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의 사전 제공은 여성들이 기존 피임 방법(콘돔, 사전피임약 등)을 사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결과는 동일했으며 오히려 청소년들은 응급피임약에 대한 부작용과 자신들의 생식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급피임약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는 현상은 여성의 임신중지 행위를 '건강권'의 관점이 아닌 성(性)윤리·사회규범의 문제로 다뤄온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깊다.

건강 문제를 사회·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연구단체 '건강과대안'의 윤정원 상임연구원은 논문 '건강권으로서의 재생산권-낙태, 사후피임약을 중심으로'(2013)에서 "사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이 될지, 일반의약품이 될지는 의학적 판단이라기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라며 "캐나다의 경우 2008년부터 특별한 의료 상담 없이 응급피임약 구매가 가능해졌는데 이는 여성 스스로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을 선택할 수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미소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한 관계자가 미소 짓고 있다. 2019.4.11 kane@yna.co.kr

한국에서는 2019년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진 이후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임신중지 행위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개정 시한을 뒀다.

정부는 2020년 10월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의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하고 임신 15∼24주에는 특정한 사유가 있을 때만 중절을 허용하는 개정 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생명윤리 등을 이유로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측과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를 지지하는 측이 모두 반발하면서 개정이 무산돼 현재 입법 공백 상태다.

이에 따라 정치권이 여성의 건강권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여성민우회 정슬아 활동가는 "(피임이나 임신중지 약품이) 부작용이 있어 문제가 된다면 있는 그대로 여성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며 "그것이 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낮출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여성의 임신중지권은 종교계나 의사업계와의 대결 구도로 다뤄져서는 안 되고, 건강에 대한 기본적 권리로 봐야 한다"면서 "피임과 임신, 출산의 모든 과정에서 여성들이 처할 수 있는 복잡한 상황을 통합적으로 고려하고 고민할 수 있을 때 제도가 제대로 구축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회장은 "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는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이견이 없다"며 "응급피임약의 위험성을 고려할 때 처방 전 의사와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신중지 공적의료서비스 보장 촉구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소속 회원들이 8일 서울시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임신중지의 공적의료서비스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1.3.8 srbaek@yna.co.kr

woo102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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