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란 일종의 ‘연극’은 아니었을까

한겨레21 2023. 3. 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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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라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진핑의 종신집권, 전 인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디지털 독재,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강제수용소를 떠올리면 중국만큼 '전제적인' 나라가 또 없어 보인다.

전제국가는 사회적 동의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구성원의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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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화폐의 흐름으로 재해석한 중국의 전제주의 <청대 중국의 경기변동과 시장>
<청대 중국의 경기변동과 시장>, 홍성화 지음, 성균과대학교 출판부 펴냄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라는 말이 있다. 동양은 무소불위의 지도자와 약탈적 관료집단에 수탈당하며 영원히 야만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꽤나 고약한 이야기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지만, 누군가는 최근 중국을 보며 이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시진핑의 종신집권, 전 인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디지털 독재,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강제수용소를 떠올리면 중국만큼 ‘전제적인’ 나라가 또 없어 보인다. 애초에 동양적 전제주의를 개념화한 카를 비트포겔이 탁월한 중국학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전제주의는 그냥 중국의 변함없는 특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이야 그렇다 쳐도, 과거 중국에서 과연 ‘전제’(專制)란 게 가능했을까? 어쩌면 전근대 중국의 전제주의란 중앙의 황제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뤄진다는 ‘기분’을 느끼게끔 나머지가 알아서, 요령껏 처신하는 연극은 아니었을까? 홍성화의 <청대 중국의 경기변동과 시장>은 이런 관점에서 중국의 전제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청나라 시대 사회경제사 연구자인 지은이는 화폐에 주목한다. 화폐야말로 제국의 지배력이 얼마나 널리, 깊숙이 미쳤는지 가늠하는 척도기 때문이다.

진시황 이래 천하통일은 곧 도량형의 통일이었다는 통념이 무색하게도, 청은 제국을 아우르는 단일한 화폐를 마련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액권인 은은 액수가 기입된 화폐가 아닌, 덩어리 형태로 유통됐다. 농민이 사용하던 동전 역시 국가가 발행한 제전(制錢)만큼이나 민간이 찍어낸 사주전(私鑄錢)이 널리 쓰였다. 발행 주체도, 단위도, 순도도 천차만별이라 상하이 인근의 작은 마을인 주가각진(朱家角鎭)에서만 은은 세 종류, 동전은 네 종류 넘게 쓰였다. 셀 수 없이 많은 화폐가 유통되는 상황에서, 믿을 건 오로지 소재가치뿐이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몰아낸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청에서는 통하려야 통할 수 없었던 이유다.

청에는 별다른 경제적 중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명나라 말기까지 부동의 ‘경제수도’이던 강남 지방은 정체한 반면, 낙후한 서쪽과 북쪽 지방은 성장했다. 이러한 ‘균형발전’은 각 지역의 자급자족을 촉진해, 외려 전국 시장의 통합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심지어 농민마저 상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면포를 비롯한 생필품을 ‘알아서’ 생산했다. 지은이가 적절하게 표현했듯, 청대 중국은 하나의 커다란 호수라기보다 작은 격벽이 세밀하게 쳐진 논들의 집합이었다. 도시와 농촌, 관료와 신사(紳士), 상인과 농민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업화 흐름에 올라탔다. 부가 특정 지역과 계층에 집중된 일본이나 유럽과는 달랐다.

지은이는 청대 중국이 보여준 자율성과 분권성이 전제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전제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전제국가는 사회적 동의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구성원의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잘 쳐줘야 근대까지의 이야기일 뿐,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중을 직접적으로 동원하는 ‘뜨거운 전제국가’로 변모했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하지만 전제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중국사의 역설적인 ‘장기 지속’이 그리 쉽게 끊어졌을지, 한편으론 자못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제는 고전이 된 판타지소설(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중국은 단수가 아니니까.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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