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정치, 문화는 문화’라는 20대 [임명묵의 MZ학 개론]

임명묵 작가 2023. 3. 2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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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부터 불고 있는 국내의 ‘일본 붐’ 현상 
젊은 층, 기성세대와 달리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 없어

(시사저널=임명묵 작가)

한국인인 우리 자신도 '한국의 극단성'에 대해 늘 느끼고 살지만, 아마 근래의 일본인들만큼 이를 절절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 측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 그에 따라 시작된 전 국민적인 반일 불매운동인 '노재팬' 물결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면서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2020년 새해 벽두부터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3년의 시간 동안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양국 국민 간 교류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사이 한국에서는 '일본 쇠퇴론'이 크게 유행하기까지 했다. 과연 팬데믹이 끝나고 양국 간 이동과 교류의 제약이 풀리더라도 이전처럼 한일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까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300만 관객을 돌파한 3월16일 서울 시내 한 영화관을 찾은 시민들이 슬램덩크 홍보물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대 이후 한일 위상, 완전히 달라져

하지만 2023년 벽두부터 신기한 일들이 생기고 있다. 올해가 '일본 붐'의 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국에서 일본을 찾는 기세가 엄청나다. 1월에 개봉한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중에는 최초로 400만 관객을 돌파할 정도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3월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도 6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동원해 올해 최단 기록을 세웠다. 

전통적인 일본의 강점 영역인 애니메이션 말고도 일본 붐은 여러 방면에서 신호가 나타난다. 한국 코미디언 김경욱이 2000년대의 전형적인 일본 남성처럼 연출해 만든 캐릭터 '다나카상'은 유튜브 등에서 컬트적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정도면 아예 한국에서 일본을 재창조한 셈이다. 노재팬과 코로나로 단절되었던 일본 여행의 회복세도 완연하다. 일본 관광국에 따르면 1월에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약 150만 명 가운데 한국인이 56만 명을 차지해 비율로 37.7%를 기록했다.

물론 문화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3월8일 시사저널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9.5%가 윤석열 대통령이 새로 제시한 강제징용 제3자 변제 배상안에 반대했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일본과 관계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급진적인 결정은 문화적인 일본 붐에도 일정 부분 찬물을 끼얹는 모양새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이 문화 소비와 교류까지도 대폭 위축시켰던 2018~19년과 달리, 2023년은 '정치는 정치, 문화는 문화'라는 분리 의식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점은 확실히 다른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청년층의 동향이다. 역시 같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의 동향은 30~50대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40대와 50대에서 제3자 변제안에 대한 찬성 여론이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반대가 70%에 육박하는 것과 비교하면, '41.5%의 찬성과 45.2%의 반대'의 결과를 보여준 20대의 여론이 몹시 두드러진다. 게다가 대부분 연령대에서 1~3%만 '모르겠다'고 답한 반면, 20대는 무려 13.2%가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양국의 정치적인 문제에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전반적으로 20대에서도 근소하게 반대 여론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추세는 분명 변하고 있다.

20대에서 일본에 '전향적' 태도를 보이는 움직임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20대부터는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설명이 많다. 앞세대가 성장한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한일 양국의 국력과 문화 격차가 엄청났다. 한국을 식민지배했던 제국이 여전히 거대한 규모와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고 있으니, 일본 문화를 선망하면서도 일본을 극복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한일 관계 악화 상황에서 日 젊은 층도 '한류' 열풍

하지만 지금 20대의 세계관을 만든 2010년대 이후에는, 한일 양국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본이 다소 침체된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반면, 한국 문화는 글로벌 문화로 거듭났고, 산업적·정치적 글로벌 입지도 커졌다. 일본과의 관계나 일본의 시선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과거 세대와 달리 이제는 일본에 그다지 과한 관심을 두지 않으며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설명은 20대에서 유난히 '모르겠다'는 응답이 두드러지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이런 일반론은 2023년에 다시 일본 붐이 일어나는 이유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일본이 문화적으로 침체되었고 콤플렉스도 없다면 그냥 무관심으로 대하면 그만인데, 올해는 정말 눈에 띄게 국내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본 문화가 다시 '부활'이라도 한 것일까? 그다지 변하지 않는 일본의 보수성을 생각해 봤을 때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이해하기 쉽고 가까운 외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잠재적 수요가 한국에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는 한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여행지로서 일본은 다니는 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도 이국적인 문화를 즐기기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즉, 어떠한 계기만 주어지면 일본은 '유행'으로서 돌아오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유는 20대들의 문화적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20대는 관성적인 것에 빠르게 싫증을 느끼며 선호가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유행을 주도하는 연령대다. 이런 특성은 굉장히 강력한 반문화 지향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주류 사회에서 강조하는 것이라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주류적이라는 이유에서 일단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노재팬으로 시작된 반일 기류는, 처음에는 20대도 참여했을지라도 언젠가는 싫증을 느끼며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갈' 계기를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일본과의 단절이 생각 이상으로 훨씬 길어지기까지 했으니, 압력이 누적되었다가 2023년에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청년층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된 일본 붐은 양국의 건설적 관계를 복원하는 데 다시금 중요한 자산이 되어줄 수 있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한일 시민들의 감정이 최악의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 데 일본의 한류 유행이 큰 역할을 해주었듯이 말이다. 물론, 문화적 친밀감이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우호 관계로 자동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최근 대일(對日) 인식에서 '정치는 정치, 문화는 문화'라는 분리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반대로 정치가 조급증을 내면 문화적으로는 다시 강한 반동이 올 수도 있다. 문화적 친밀감을 발판 삼아 양국 관계를 건설적으로 회복하는 데 필요한 정치권의 현명한 청사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진 시점이다.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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