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주 69시간제 반대'는 프레임 탓? 우리에게 없는 미래

제희원 기자 입력 2023. 3. 21. 11:24 수정 2023. 3. 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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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시간 '유연화'보다 중요한 것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쉬어라"라고 얘기한 적이 있죠. 당시에는 농담인가 싶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통령 장단에 손뼉 맞추듯 고용노동부가 개편안을 내놨지만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날 선 비판이 쏟아진 다음에야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근로시간 개편안을 원점 재검토하기로 했습니다.
 

MZ세대가 좋아할 거라던 '주 69시간제', 반대 여론은 가짜 뉴스 탓?

그럼에도 정부 정책 담당자들은 여전히 '가짜 뉴스'탓에 여론이 왜곡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번에 내놓은 개편안은 기존 주 52시간제와 일하는 시간의 총량 자체에는 차이가 없고, 오히려 유연성을 둔 것인데 특정 주의 근로시간만 부각되었다는 거죠.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69시간이라는 극단적이고, 일어날 수 없는 프레임이 씌워졌다"라며, 극단적 가정으로 비롯된 오해가 커졌다는 고용노동부 해명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보완을 지시한 지 나흘 만에 다시 '주 60시간 이상이 나올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 모두의 운명이 달린 근로시간을 두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모양새입니다.
 

근로시간 둘러싸고 갈팡질팡, 진짜 중요한 게 빠졌다


정말 사람들은 특정 주에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사실에만 집중해서 분노를 쏟아내는 걸까요? 고용노동부가 이번 개편의 핵심이 '근로자의 선택권 확대'라며 특정 주 최대 69시간 근무를 가정한 달력을 SNS에 올려뒀습니다. 신상품 출시를 가정한 상황이라고 하네요. 1주와 2주에는 토요일을 포함해 오전 9시~오후 10시 근무 / 오전 9시~오후 8시 30분 근무 / 3주와 4주에는 오전 9시~오후 6시 근무하는 방안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현행 주 52시간제 하에선 한 달 내내 오전 9시~오후 8시 30분 근무를 하면서, 늘 저녁은 회사에서 먹게 된다고 적어뒀습니다. 여러분은 이 근무표에 공감하시나요? 누리꾼들 반응은 이랬습니다.
 
인원을 더 뽑아서 일이 주 40시간 안에 끝날 수 있게 해야지. 왜 연장을 시켜서 일을 끝내려고 하는지

3~4주 차 때는 일이 없나?

A 라는 업무를 담당하는 김대리가 장기 휴가를 쓰면 그 업무는 조상님이 담당하나?

누가 모르냐? 안 지키니까 문제지.

고용노동부부터 싹 다 69시간 일해라.

시대에 역행한 주 6일 근무가 웬 말?
정시 퇴근이 왜 '묻지마 칼퇴근'이 되는 거야?

과로사하기 딱 좋은 근무표네
 

경직적인 근로시간? 유연화보다 시급한 건 '일하는 시간 줄이기'


그럼 우리나라 근로시간 관리가 정말 경직적인 편일까요? 현행 근로기준법은 모든 일하는 사람이 주 40시간을 넘지 않도록 일하되 업무 폭증 등 필요할 경우 12시간을 더 일하도록 하고 있지요. 이 밖에도 탄력근로시간제나 재량근로시간제, 간주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등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이미 마련해뒀습니다. 문제는 이런 제도들이 노동자의 제대로 된 휴식권을 보장하지 못하고, 주로 기업 입맛에 맞는 과로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전체 노동자의 약 80%에 달하는 100인 미만 소규모 사업체 노동자들의 연장근로는 근로기준법상 '당사자의 동의'가 아니라 사용자의 일방적인 지시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있는 법도 잘 안 지켜지는데 자율과 선택이 웬 말이냐는 얘기가 그래서 나옵니다.
 

연차도 다 못 쓰는 현실, 왜 못 바꾸나

전 세계에서 많이 일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우리는 이미 충분히 과로하고 있지요. 반면, 이미 정부가 정말로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도를 손보고 싶었다면, 좀 다른 상상력을 발휘했어야 합니다. 가령있는 연차도 못 쓰는 현실부터 손 보기는 어려웠을까요? 직장갑질119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직장인 10명 중 8명은 15일의 법정 연차휴가도 다 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차를 모두 쓴 직장인은 19.4%에 불과했고요. 반면 연차휴가를 6일도 못 쓴 직장인은 전체의 41.5%나 됐습니다. 요식 행위에 그치는 고용주의 연차 사용 독려 외에 실제 노동자가 무조건 연차를 쓸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제도 등이 절박한 이유입니다. 유럽보다 연간 400~500시간이나 많은 근로시간 총량 자체를 줄일 수는 없었을까요? 일과 가정의 양립을 개인의 노력에 떠맡기는 대신, 사실상 법전에만 있는 육아기 근로 단축 제도 등을 일반 기업에서도 활성화하는 방안은 고민한 흔적도 이번 개편안에서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주 60시간은 괜찮습니까'


사실 근로시간 취재를 하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장시간 근로가 가능해진다는 정부의 시그널로 인해 가장 먼저 과로에 내몰릴 사람은 누구일까. 고용의 형태가 불안할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직급이 낮을수록, 작은 사업장일수록 가장 먼저 장시간 노동의 앞자리에 불려 나올 거란 생각에 착잡했습니다. 정부 설명대로 1, 2주 차에 몰아서 일하고 3, 4주 차엔 정시 퇴근할 수 있는 직업이 과연 얼마나 될지, 정책 담당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본 건지도 의문입니다. 가장 먼저, 선택권을 빌미로 더 많은 시간 일해야만 소득 보전이 가능한 저임금 노동자들이 고용주의 추가 근로 요구를 뿌리치기 어렵게 되지 않을까요? 설령 69시간에서 60시간으로 줄어든다 한들, 지금보다 늘어나게 될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야기할 문제는 없을까요? 이런 고민은 적당히 넣어둔 채, 사용주가 동의할 만한 수준의 방안을 개혁안으로 포장해 내놓은 건 아닌지 의뭉스럽습니다. 애초 52라는 숫자를 64나 69라는 이해하기 힘든 숫자로 바꾼 건, 현장의 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정부였습니다. 이미 일터에서 차고 넘치도록 치열한 일상을 감내하는 노동자들의 분노마저 '프레임 탓'하는 건 너무 궁색합니다. 이런 현실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오늘보다 더 나아질 내일을 그리기 어렵습니다.

제희원 기자jess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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