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협상에는 배트나(BATNA)가 필요하다.

정양범 매경비즈 기자(jung.oungbum@mkinternet.com) 2023. 3. 2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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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초의 일이다. 당시 H사는 국내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였지만, 13억 인구와 무한한 성장 잠재력을 가진 인도에는 차 한대도 못 팔고 있었다. 글로벌 10대 자동차 메이커로 등극하는 것만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 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인식했고, 그것이 전사적 목표인 때였다. 그러므로 해외공장 건설을 통한 시장확대는 시대적 요구 상황이었다. 인도공장 건설프로젝트의 선발대로 선발되어 이른 새벽에 쿰쿰한 냄새의 뉴델리 공항에 내렸다. 그 후 인도 각지를 돌며 여러 공장부지를 물색하여 보고하였고, 최고 경영자가 인도에 출장 와서 T 주 소재 부지를 최종 승인하였다. 연산 10만대의 자동차 공장을 세워 10,000명 이상의 직간접 고용을 창출할 것이니, 부지 취득, 인프라 개발, 세금 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T 주 정부에 요구하였다.

협상이 잘 될 리가 없었다. H사는 손에 쥔 모든 패를 보여주고 아무런 ‘밀당’없이 협상을 시작한 것이니, T 주 정부측에서 보면 너무나도 쉬운 협상 상대가 그물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주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자유치 노력을 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찾아가 투자하겠다고 했으니, H사의 협상력은 거의 제로에서 시작한 것이다. 담당 장, 차관은 협상팀을 홀대하였고, 인센티브 요구 사항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거의 무시되었다. 인도 경제에 엄청난 고용과 파급효과를 가진 프로젝트였지만 처음에 아무 전략없이 시작한 협상이었다.

협상(Negotiation)이란 “협상 상대로부터 무엇인가 얻고자 할 때 또는 상대가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자 할 때 생기는 상호작용의 의사소통과정(Interactive communication process)이다” 라고 와튼 스쿨의 리차드 쉘(Richard Shell) 교수가 정의하였다. 그 의사소통과정을 통해 갈등과 의견의 차이를 해소 또는 최소화하여 양측이 각자 가지고 있는 ZOPA(합의가능영역; Zone Of Possible Agreement)에 들어왔을 때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ZOPA 내에서도 의도한 협상 성과를 성공적으로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협상의 5대 요소’가 중요하다고 안세영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말한다. 그는 “높은 목표, 강한 협상력, 좋은 관계, 충분한 정보 그리고 BATNA”가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5대 요소라고 꼽았다.

T 주와의 인센티브 협상이 예상과는 달리 잘 진행되지 않으니, H사의 공장 건설프로젝트 전체가 위태로워졌다. 협상 실무자로서 선발대로 간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피 말리는 나날로 너무나도 괴로웠다. 정해진 기간 내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는 것이 시장개척 및 확장에 필수적인 것이므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시간 제약’의 압박은 선발대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또 하나의 약점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T 주의 태도를 확 바꿀 수 있는 결정적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BATNA였다. 인도의 유력 경제신문 기자와 저녁을 하면서 슬그머니 말을 흘렸다. T 주와는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서 경쟁 관계에 있는 이웃 A 주를 공장 부지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바로 다음 날 크게 기사화 되었고 그로부터 T 주는 태도를 확 바꿔 적극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BATNA는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의 머리 글자로서, 협상이 결렬될 위기에서 ‘한 당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하버드 대학의 협상이론학자인 피셔(Fisher)와 유리(Ury) 두 교수가 공동 창안한 것으로서, 좋은 대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만큼 협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단순한 물건의 거래에서 구매자에게는 대체 가능한 여타 공급자가 BATNA이고, 공급자에게는 대기 중인 또 다른 구매 희망자가 BATNA이다. 다국적 기업의 중대한 비즈니스 협상이나 국가간 협상에서 일시적 Walk Out, 협상 중단이나 결렬 선언, 다른 파트너의 물색이나 제휴 추진 그리고 법적 기관에 중재 의뢰 등의 여러가지 심각한 국면이 알고 보면 상대방에게 압력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BATNA인 경우가 많다. BATNA는 지나치게 불리한 협상안을 수용하거나(Poor Deal), 또는 반대로 아주 유리한 협상안을 거절하는 상황을 예방해주는 역할을 하는 기준이라고 하버드의 두 교수는 강조한다. 협상자는 사전에 자신의 BATNA를 충분히 확인하고 준비하여 그 BATNA를 ZOPA 설정 시 활용하여야 한다. 즉 협상의 기대 결과가 BATNA 보다 낫다면 협상은 즉시 타결할 것이며, BATNA보다 못하다면 그 협상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H사는 좀 늦었지만 훌륭한 BATNA를 언급함으로써 T 주에서의 인센티브 협상을 마무리하고 인도공장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또 그 프로젝트의 성공을 계기로 해외공장 건설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타 시장에서도 생산과 판매의 현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젠 최근 뉴스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한 때 세계 자동차업계의 Big 3 중 최고봉이었던 G사의 인도공장을 인수하려는 협상을 하고 있다. 사전에 충분하고도 확실한 BATNA를 파악하고 그것을 ZOPA에 반영해서 협상을 잘 마무리하리라 기대된다.

협상팀이 BATNA 등 ‘5대 요소’를 잘 준비해서 적절한 협상전략을 사용하면 외부와의 협상은 잘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협상팀에게 더 어려운 상대는 협상 전후 등뒤에서 쳐다보는 내부 사람들이다. 즉, 외부와의 협상보다도 내부의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 협상팀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협상 테이블에 나가기 전에 내부 이해관계자들의 지지와 승인을 받고 나간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협상의 보안성과 상대성 그리고 불확실성 때문에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런 절차를 충분히 밟고 나갈 수 없다. 국가간 통상협상에서도 상대국과의 잠정적 합의(Tentative Agreement)는 마쳤지만 그 내부 승인과 비준에 몇 년 씩이나 걸린 사례가 많다.

이런 외부와 내부 협상을 미국의 정치학자이며 하버드대학 교수인 로버트 퍼트남(Robert D. Putnam)은 ‘2단계 게임(Two-level Game)’이라고 표현했다. 협상은 그 1단계 외부와의 게임보다 2단계 내부와의 게임이 더 시간을 소모하고(Time consuming), 자칫하면 걸림돌이 되어 발목을 잡기도 한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해 한국에 와서 S사 H사 등에게 대규모 보조금을 언급하면서 초대형 투자를 유치했지만, 막상 그 보조금 문제는 당초에 기대됐던 것처럼 녹녹하게 풀어주지 않고 있다. 미국 중간선거에서 심판할 등뒤의 유권자를 의식한 상태에서 자국산업 보호와 중국 견제라는 기치를 든 내부 세력과의 2단계 게임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발표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과도한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과 모호한 부분을 많이 내포하고 있으므로 미국에 진출하는 반도체 및 전기자동차 관련업계의 애를 태우고 있다.

해외 현지공장을 세우려는 다국적 기업에게는 노조가, 타국과 협상한 정부에게는 야당과 NGO가,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자국 산업과 유권자 등이 내부의 이해관계자이다. 그들과의 2단계 게임은 늘 어렵게 진행된다. 더군다나 그 게임에는 BATNA도 ZOPA도 잘 통하지 않기에 더욱 힘들다. 이해관계자에게는 외부와의 협상 결과를 장기적 이익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냉정히 평가하고 신속히 판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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