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센스도 없던 문제아...‘세계 최고 NYT’ 만든 세 가지 비결 [송의달 LIVE]
공부 담쌓고 記者 센스 없고 경영 수업 못 받아
솔직함·겸손함, 경청과 화합으로 대반전
29년 만에 매출 170배 늘리며 NYT 도약
[미디어 프리즘]
뉴욕타임스(NYT)는 2022년 말 기준 960만명의 유료 구독자를 갖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디지털 유료 구독자는 1년 만에 200만명 늘어난 880만명으로 압도적인 세계 1위입니다. 세계 미디어 업계 전반의 불황 속에서도 NYT의 2022년도 매출(23억 832만달러)은 1년 전(20억 7487만달러) 보다 11% 늘어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지배 구조 측면에서도 NYT는 안정적입니다. 1896년부터 옥스-설즈버거(Ochs-Sulzberger) 가문(家門)이 127년째 흔들림 없이 ‘오너(owner) 경영’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워싱턴포스트(WP) 같은 미디어 기업의 대주주가 최근 10~20년 새 바뀐 것과 대비됩니다.
◇29년간 NYT 이끌어...37세에 최연소 발행인
많은 전문가들은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NYT의 초석(礎石)을 놓은 인물로 아서 옥스 설즈버거(Arthur Ochs Sulzberger·1926~2012년) 발행인을 꼽습니다. ‘펀치(Punch) 설즈버거’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리는 그는 A.G. 설즈버거 현 발행인 겸 회장의 직계 할아버지입니다.
NYT 역사상 최연소인 37세이던 1963년 발행인 겸 사장(CEO)에 취임해 1992년 물러난 그는 29년의 재임 기간동안 1000만달러 정도이던 매출을 17억달러로 170배 늘렸습니다. 그가 회장직까지 퇴임한 1997년 회사 매출은 25억달러였습니다. 20세기 세계 미디어 기업 경영자들 가운데 그 보다 더 눈부신 실적을 낸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취임 초만 해도 이런 평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창 시절 ‘지적(知的) 능력 미달(未達)자’로 제대로 경영 수업도 받은 적 없는 그에 대해 우려섞인 시선이 가득했습니다. 초중고 시절 펀치 설즈버거는 성적 부진으로 뉴욕 시내 사립학교들을 전전(輾轉)했습니다.
글과 철자(綴字)를 제대로 읽거나 쓰기 힘들어 하는 난독증(難讀症) 환자였던 그는 17세에 해병대에 자원해 입대하면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 기쁨을 처음 맛봤다”고 했습니다. 그에겐 학교 생활이 큰 고역(苦役)이었던 것입니다.
제대 후 컬럼비아대학에 진학한 펀치는 6.25전쟁이 터지자 군에 재입대해 한국 판문점 공보장교와 맥아더 장군의 비서 등으로 복무했습니다. 26세이던 1952년 NYT 수습기자로 입사했다가 ‘오너 가족은 다른 회사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가족 규칙에 따라 1953년 ‘밀워키 저널’로 옮겨 11개월간 사회부 기자로 일했습니다.
◇낮은 知的 능력...경영 수업도 못받아
이듬해 NYT 외신부에 복귀한 그는 파리와 로마 지국 근무를 거쳐 1955년 발행인 보좌역이 됐습니다. 그러나 NYT 후계자로는 펀치의 큰 자형(姊兄)인 오빌 드라이푸스(Orvil Dryfoos)가 일찌감치 내정됐습니다.
펀치 설즈버거는 낮은 지적(知的) 능력과 이혼(離婚)에 따른 불안한 가정 생활, 기자(記者)로서 감각 결핍 같은 단점만 수두룩했던 탓입니다. 실제로 1954년 어느 주말 파리 지국 소속 기자이던 펀치 설즈버거는 르망(Le Mans) 자동차 경주(競走) 대회를 찾았습니다.
그날 그곳에서 83명이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펀치는 지국에 한 줄의 기사는커녕 사고 발생 사실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뉴스 취재에는 관심과 소질이 없는 ‘존재감 없는 무골 호인(無骨好人)’이라는 평(評)이 퍼졌습니다.
반대로 드라이푸스는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다트머스대 졸업 후 뉴욕증권거래소에 다니다가 아서 헤이즈 설즈버거(Arthur Hays Sulzberger, 약칭 AHS·펀치 설즈버거의 아버지) NYT 발행인 겸 회장의 장녀와 결혼한 엘리트였습니다. 1942년 NYT에 들어온 드라이푸스는 1957년부터 경영을 도맡았고 1961년 4월 49세에 발행인에 취임했습니다. 터너 캐틀리지 당시 NYT 편집국장의 회고입니다.
“펀치는 그 무렵 회사 건물 안에서 어딘가 고장난 곳을 찾아다니는데 시간을 대부분 보내는 착한 친구였다. 그는 회사 건물의 환기 시스템을 공부하며 건물 파이프 등을 찾아다녔다.”
펀치 설즈버거 스스로도 “당시 나는 뉴욕타임스 안에서 아무런 책임을 맡지 않고 있는 임원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 해볼만한 일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빌 드라이푸스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1963년 5월 급사(急死)했을 때, AHS 부부는 26일 동안 후임 발행인 임명을 미뤘습니다. 펀치 설즈버거의 능력이 여간 미덥지 않았던 탓입니다. 펀치의 생모(生母)인 이피진 옥스 설즈버거 여사는 자서전에서 “3주일 넘게 고민하다가 ‘도박’하는 심정으로 펀치를 지명했다”고 했습니다.
◇부모, “도박하는 심정으로” 발행인 지명
마뜩찮은 외동아들을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1963년 6월 20일 그가 발행인에 취임한 당시,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인종차별 관련 폭력 사태가 난무했고, 회사 내부는 196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14일간 계속된 사상 최장기 파업 후유증으로 사기(士氣) 저하와 분열이 심각했습니다.
준비 안 된 펀치 설즈버거가 어떻게 ‘탁월한 경영자’가 됐을까요? 그의 유일한 강점은 어려서부터 NYT에서 자라 유명 언론인들에게 주눅 들거나 발행인이라는 자리의 중압감에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그는 먼저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임했습니다.
그는 사내(社內) 뉴스레터에서 “나는 재무제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상식에 입각해 예전부터 당연시돼 온 것에 의심을 품고 새로운 방안을 내놓으려 했습니다. 임직원들은 그에게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서서히 확인했습니다. ‘NYT의 기둥’으로 불린 제임스 레스턴의 회고입니다.
“펀치는 NYT의 해리 트루먼(Truman·부통령에 당선됐다가 취임 3개월 만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이 됨)이었다. 그에 대한 사내 평가는 낮았지만 그는 문젯거리들을 하나씩 결정하며 청소해 갔다. 만년 적자이던 NYT서부판(캘리포니아 지역)을 없앴고 취임 두 달 만에 ‘헤럴드 트리뷴’과의 합병 협상을 중단했다.”
두번째는 겸손함입니다. 막스 프랑켈(Frankel) NYT 전 편집국장의 말입니다.
“펀치는 자신이 있는 14층에서 내가 있는 11층으로 내려와 다른 방문객처럼 순번을 기다렸다가 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주요 광고주의 딸 결혼식을 안내 기사로 다룰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펀치는 한 번도 나를 자기 방에 불러올려 ‘이 기사를 실어라’ 또는 ‘이 기사는 싣지 말라’고 지시한 일이 없었다.”
프랑켈은 다른 글에서 “펀치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었다”며 이렇게 밝혔습니다.
“펀치를 불쾌하게 하거나 화나게 했을 때에도 우리가 듣는 말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식의 질문이다. 어떤 때 펀치가 전화를 걸어 ‘잠깐 상의할 일이 있는데 몇 분만 시간을 내줄 수 있는가’라고 물어와 ‘곧 올라가겠다’고 대답하면 그는 언제나 ‘아니, 내가 내려가겠소’라고 했다. 이것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사람됨을 나타낸다.”
기사(記事) 내용에 대해 그가 개입한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NYT 연구가인 알렉스 존스(Alex Jones)의 말입니다.
“펀치 설즈버거는 해병대에 복무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애국심 충만하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베트남 전쟁의 허구와 문제점을 비판하는 현지발(發) 기사와 칼럼에 어떠한 제동도 걸지 않았다.”
◇임직원들 믿고 존중하며 ‘뒷배’ 역할
펀치 설즈버거는 “자신이 뽑고 선택한 종업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그들이 내린 결정을 존중하고 믿어주며 ‘뒷배(back)’와 같은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세 번째는 경청과 화합입니다. 발행인 재임 기간 중 그는 다음날 A1면 기사를 정하는 오후 5시 ‘페이지 원 미팅(Page One Meeting)’에 매번 참석했습니다. 매일 오후 4시45분쯤 회장실이 있는 1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집국으로 내려가 14~15명이 앉아있는 회의실 테이블 한쪽 구석에 앉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편집 회의에 한 번도 참석 않은 아버지(AHS)는 물론 20세기 어느 신문사 오너 발행인도 실천하지 못한 독특한 면모였습니다. 회의장에서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직접 묻지 않는 한,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경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듣고 배우는 게 많고 기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어 좋다”고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출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출입카드를 꺼내 댄 뒤 출입구를 통과했습니다. 경비원이 그를 알아봐 신분증 없이 출입구를 지날 수 있었지만, 그는 “나부터 회사 내부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드니 그루슨(Gruson) 전 NYT 부회장은 “그가 조직을 얼마나 잘 운영하고 다독거렸는지는 놀라울 정도”라고 평가했고, 제임스 레스턴은 “펀치의 성공은 주로 그의 개인적 자질에 기인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발행인에게 통상 요구되는 자질이 없었다. 지식인도 아니었고, 워싱턴 정치가들이나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인물들과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상식(常識)과 인간적 접근이 오래 가며 다른 사람의 말을 언제, 어떻게 들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증시 상장·M&A로 기업 현대화
펀치 설즈버거가 이룬 경영 성과로는 1969년 1월 14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NYT 기업 공개(IPO)를 하고 여기서 마련한 자금으로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연이어 성공시킨 게 대표적입니다. 이 두 가지는 소극적이고 주먹구구식 전(前)근대적 경영과 결별하는 ‘분수령’이었습니다.
1971년 6월 13일자부터 NYT A1면을 장식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 특종보도로 독립 언론의 금자탑(金字塔)을 쌓았습니다. 이 보도는 1960년대 미국 행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의도적인 확전을 꾀해왔다는 내용을 담은 국방부 비밀 문서를 폭로한 것입니다.
닉슨 행정부와의 법적 공방 끝에 승리함으로써 회사 폐쇄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와 결단력을 보인 펀치 설즈버거의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그는 ‘두려움이나 특혜없이(without fear or favor)’를 자신의 신조(信條)로 삼고 고비 때마다 외부 권력자 보다 NYT 기자들을 전폭 신뢰했습니다.
◇大특종·세계 최초 요일별 ‘섹션 혁명’
1976년 1월부터 78년 하반기까지 단계적으로 도입한 요일(曜日)별 생활·문화 관련 별도 지면을 발행한 ‘섹션 혁명(sectional revolution)’도 주목됩니다. 지금도 NYT는 매주 월요일 스포츠(Sports)를 시작으로 금요일까지 사이언스(Science Times), 리빙(Living), 홈(Home), 위켄드(Weekend) 섹션을 발행하고 있는데, 많은 세계적 매체들이 NYT의 지면 혁신 사례를 모방해 따라왔습니다.
1973년부터는 월터 맷슨(광고·판매·공무), 제임스 굿데일(법무·재무), 시드니 그루슨(자회사) 등 전문경영인 부사장들로 ‘3두(頭) 체제’로 경영 현대화를 가속화했습니다.
그는 간부들과 종종 주말 부부 동반 만찬을 했고 동반 해외 여행 등으로 유망 사원의 됨됨이를 매겼습니다. 열정적인 비워싱턴 지국 출신의 A.M. 로젠탈과 합리적이고 차분한 워싱턴 지국 출신인 막스 프랑켈 간의 견제와 경쟁을 유도하며 두 사람에게 총17년간 편집인(executive editor) 자리를 맡기는 용인술(用人術)도 구사했습니다.
펀치 설즈버거에게 불변(不變)의 요소는, 그가 ‘개인이나 가족 보다 뉴욕타임스 최우선 정신’에 투철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NYT 옥스-설즈버거 가문’의 시조(始祖)인 아돌프 옥스(Adolph Ochs) 이후 이어져온 “NYT는 상업적 기업이 아니라 책임있는 공적(公的) 기관(public institution)”이라는 신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NYT 위해선 野心·富도 희생한다”
펀치 설즈버거는 실제로 자신이 11세때부터 3명의 누이들과 함께 가문 전담 변호사인 에디 그린바움에게 1년에 1~2회씩 ‘NYT와 설즈버거 가문’을 주제로 집중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교육의 핵심 메시지는 ‘NYT는 성(聖)스러운 존재이며, 가족 구성원들은 NYT의 저널리즘 정신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조타수(操舵手)’라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NYT가 좋은 경영 성과를 내려는 목적은 가족이나 주주(株主)들이 부자가 되려는 게 아니라 신문의 독립(independence)과 품위(integrity)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가르침도 들었습니다. 1987년 미국 증시 대폭락 여파로 광고 매출이 40% 정도 급감하는 상황에서, 펀치 설즈버거가 편집국 내부 낡은 카펫과 바닥 교체를 위해 30만달러의 사비(私費)를 쓴 것은 평소 가치관을 실천한 행위였습니다.
1896년부터 5대째 130년 가깝게 오너 경영을 하면서 설즈버거 가문 사람들은 단 한 번의 경영권 분쟁도 벌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언론학자인 수전 티프트와 알렉스 존스의 지적대로 “설즈버거 가문 사람들은 자신의 의무이자 영광인 NYT를 위해서라면 야심(野心)은 물론 부(富)도 기꺼이 희생한다”는 공감대를 공유한 덕분입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신문의 전성기(全盛期)에 NYT 경영을 맡은 펀치 설즈버거는 가문의 가치관(價値觀)과 전통, 신념(信念)을 현장에서 실천한 최고경영자였습니다. 그의 유연하면서도 넉넉하고 진정성있는 리더십에 감동한 임직원들은 그와 한 마음을 이뤄 ‘뉴욕 지역 신문’의 한계를 뛰어넘고 ‘세계적 권위지’로 발돋움하는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펀치 설즈버거는 훌륭한 사람들과 시대를 잘 만났다는 점에서 ‘행운아’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올바른 자세(姿勢)와 헌신의 사명감(使命感)이 없었다면, 그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언론 경영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대와 장소, 환경은 달라도 펀치 설즈버거 개인과 설즈버거 가문이 보여 준 성공과 혁신은 언론은 물론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한국 경영자들에게도 적잖은 귀감(龜鑑)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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