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선운사 벚꽃이 곧 터질 무렵 ‘상춘곡’

김민철 논설위원 입력 2023. 3. 2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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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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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상춘곡’은 요즘 읽기 좋은 소설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수선화, 개나리, 목련은 피고 벚꽃과 선운사 동백은 아직 피지 않은, 딱 요즘이다.

소설은 젊은 날 불 같은 사랑을 하다 헤어진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데, 첫 문장이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이다.

편지를 쓰는 화자와 전 연인은 열흘 전, 7년만에 재회해 벚꽃이 피면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나눈다. 화자는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미리 남쪽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죽 북향할 작정’이다. 그 남쪽 지점이 10년 전 두사람이 사랑을 나눈 선운사다.

막 피기 시작하는 벚꽃.

선운사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봄빛이 따뜻하게 올라오’는 시기였다. 그래서 많은 꽃들이 차례로 피는 것을 그리고 있다. ‘동백장 앞마당에 한 주 서 있는 목련이 엊그제 터졌’고, ‘오늘은 길가에 노랗게 휘어져 있는 개나리가 보’였다. 산신각 앞에는 ‘물에 젖은 수선화 몇 송이가 향내를 맡으며 샛노랗게 피어 있’었다(소설에서 화자가 우연히 미당 선생을 만나 ‘수선화를 보았다’고 하자 ‘수선화가 아니라 그건 석산이라 부르는 걸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지만, 석산은 가을에 피는 꽃이므로 수선화가 맞을 것이다).

초봄에 피는 수선화.

그리고 ‘숲엔 이름을 모르겠는 보랏빛의 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송악이며 차나무, 조릿대, 맥문동, 마삭덩굴, 줄사철나무 같은 것들이 한창 눈을 비벼 뜨고 있는 중이었’다. ‘숲엔 이름을 모르겠는 보랏빛의 꽃들’은 무엇일까. 길가라면 큰개불알풀일 수 있지만, 초봄 숲에 깔려서 피는 보랏빛 꽃이라면 금창초 아닐까 싶다. 금창초는 봄에 산기슭이나 길가에서 낮게 깔려서 보라색 꽃을 피우는 꿀풀과 작은 식물이다. 주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무리지어 땅을 덮으며 자란다. 내장산에 많으니 인근 선운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금창초. 봄에 보라색 꽃이 피고 잎은 바닥에 깔리듯이 붙어 달린다.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다.

아직 ‘선운사 뒤편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3천 그루의 동백나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선운사 동백나무는 춘백(春栢)이라 다른 동백나무보다 꽃 피는 시기가 좀 늦다. 그래서 ‘마애불 옆에 서 있는 한 그루 동백나무에 무수한 꽃들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본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일반 동백꽃은 1~2월에도 피기 때문이다.

선운사 동백나무숲. 동백나무는 수분이 풍부해 아왜나무 등과 함께 방화수로 쓰이는 나무다.

‘연두빛’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다. 10년 전 화자는 불쑥 사랑을 고백하고 선운사 석상암으로 내려가 연인을 기다렸다. 그렇게 보름을 보내고 화자는 아침에 ‘문득 잠든 내 얼굴에 감겨 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것은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두빛 봄 햇살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 초봄 숲이나 공원 등 주변이 서서히 연두빛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은 꽃을 보는 것만큼 보기 좋다.

초봄 연두빛 숲. 귀룽나무 새잎이다.

선운사에서 만난 이후 둘은 사랑에 빠졌지만 1987년 6월항쟁으로 어수선한 시국에서 멀어졌다. 전 연인은 다른 선배와 사귀다 2년 후 결혼하고 애를 낳고 이혼했다. 그 연인을 결혼 직전 만나고 7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선운사 벚꽃은 여전히 피지 않았고 ‘며칠 안짝이면 꽃망울을 터질 듯’하지만 화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올라가기로 했다. 미당 선생을 만난 직후 선운사 만세루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흐드러져 있는 벚꽃의 무리’ 환영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꽃 말고도 ‘산에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를 보듯 당신의 붉은 손톱을 떠올리면서’, ‘요사채 내 방문 앞으로 돌진해 오던, 동백처럼 붉던 당신의 얼굴’ 등과 같이 연인을 꽃에 비유한 문장도 있다.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는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윤대녕 소설을 즐겨 읽는 것은 그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여행 에피소드와 여인과의 조우 등이 재미있고, 소설의 시적인 분위기와 문장도 좋지만 꽃을 상징 또는 주요 소재로 쓴 소설이 많기 때문이다. ‘3월의 전설’은 구례 산수유마을 산수유, 화개 벚꽃, 섬진강 매화가 등장하는 등 화려한 봄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소설이다. ‘천지간’엔 동백꽃, ‘피에로들의 집’엔 아몬드나무 꽃이 주요 배경으로 나오고, 대책 없이 도자기에 빠져 아내까지 잃는 남자를 다룬 ‘도자기 박물관’에는 사과꽃 향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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