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지식·교훈 가공으로는 탄생할 수 없는 ‘초콜릿어’와 ‘고래 노래’[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입력 2023. 3. 20. 22:25 수정 2023. 3. 2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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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두 개의 언어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난독증 친구와 난민 아이가 초콜릿과 로쿰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고, 말 못하는 아이가 외톨이 고래를 위로하는…
두 책에서 보이는 소재·주제는 겉으론 다르지만 서로 다른 언어 세계를 지닌 존재가 연결되고 만나는 ‘내면’ 맞닿아 있어
단순 형식으로 전달하는 동화·동시부터 허술한 지식 늘어놓는 지식정보책이 아동문학으로 분류될 수 없는 이유다

어른 독자 대상의 책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책 역시 다양하다는 점을 알릴 필요를 종종 느낀다. 어른 독자는 소설과 에세이와 학술서를 헷갈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이책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는 그저 단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책의 하위 분류에 아동문학과 지식정보책이 있고, 아동문학에는 그림책과 동화와 동시가 있다는 걸 잘 모른다. 설령 알더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어린이책을 낱낱이 파악하지 않고 그저 어린이가 읽는 책, 그뿐으로 생각한다. 도서 십진분류법의 분류기호 하나에 어린이책이 몽땅 들어가는 양 여긴다. 당연하게도 어린이책은 000부터 900까지 모든 분류기호를 아우른다.

어린이책의 분류는 좋은 어린이책을 만들고 알리는 데 중요하다. 분류 체계는 각 분류 항목의 구심력을 생각하게 한다. 구심력이 약할 때 되다 만 책이 나오기 십상이다. 교훈을 단순한 형식으로 전달하는 게 아동문학이라고 오해하는 동화와 동시, 허술한 지식을 대화체나 이야기로 늘어놓으면 그만인 줄 아는 지식정보책이 허다해진다. 문학의 구심력도, 교양서의 구심력도 없어서다. 어린이책을 다 뭉뚱그려 보기 때문이다. 어린이 독자의 인식과 감성을 낮추어 보며, 분야를 막론하고 교훈이나 지식을 얄팍하게 가공하는 게 어린이 독자를 고려하는 일이라고 착각해서다. 어른 책처럼 픽션과 논픽션의 분야를 넘나드는 훌륭한 어린이책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구심력조차 갖추지 못한 수많은 어린이책을 볼 때마다 여전히 구심력을 말하게 된다.

학습 주제에 맞는 아동문학 작품 목록을 요청하는 독서 현장을 두고서 고민스러운 이유도 이러한 생각에서다. 대개 학교와 도서관, 가정에서는 특정 주제에 부합하는 어린이책을 찾는다. 그 목록에 지식정보책뿐 아니라 아동문학 작품이 포함되는 건 물론이고, 아동문학 작품만으로 목록을 꾸리기도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학습주제별 도서 목록을 구성하는 작업이 지식정보책 외에 아동문학까지 가능하고 적절한지 의문이다. 어른의 독서와는 분명히 비교된다. 어른 독자는 우정을 주제로 하는, 다문화를 소재로 하는,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소설을 찾아 읽지 않는다. 지식과 정보는 교양서에서 찾을 일이다. 학습 주제별 작품 목록에 치중하는 건 아동문학과 어린이 독자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따져보게 한다. 우리는 아동문학도 문학이라고 말은 하지만 정말로 온전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지. 여전히 어린이 독자에게 지식과 교훈을 전달하는 목적을 우선적으로 혹은 필수적으로 여기지 않는지.

물론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서에 문학작품이 포함될 수 있다. 문학작품은 지식정보책과 다른 방식으로 학습자의 감수성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매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작품은 주제로 해석되는 것이지 주제 아래 환원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제 아래 작품을 귀속시킨다면 주제라는 기준에 명확히 들어맞는 작품이 우선적으로 선정되고 작품성은 도외시될 게 뻔하다. 학습 주제별 작품 목록을 찾으려는 이유부터가 얼마간 문학이라는 그릇에 먹기 좋게 담아놓은 주제를 가르치려는 데 있다. 교육 현장의 요구에 따른 이러한 수요는 소재주의 등 아동문학 창작에도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다분하다.

초콜릿어 할 줄 알아? 캐스 캐스터 지음 | 장혜진 옮김 | 봄볕 | 2019년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작품을 리뷰하거나 비평하는 나의 작업 역시 주제로 작품들을 엮는 과정에서 생산하거나, 결여하거나, 왜곡하는 의미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염려로 이번 글에는 주제가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두 권의 책을 가져와 보았다. <초콜릿어 할 줄 알아?>(캐스 레스터 지음, 장혜진 옮김, 봄볕, 2019)와 <나의 고래를 위한 노래>(린 켈리 지음, 강나은 옮김, 돌베개, 2020)다. 영국이 배경인 <초콜릿어 할 줄 알아?>는 열세 살 ‘재즈’와 시리아 난민 ‘나디마’가 튼튼한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나디마가 7학년 R반에 처음 온 날 둘은 초콜릿과 튀르키예 사탕 로쿰을 서로 주고받으며 친구가 된다. 해시태그를 써서 책의 주제어를 뽑아보자면 ‘#난민#다문화#로쿰#초콜릿#우정’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미국이 배경인 <나의 고래를 위한 노래>는 농인인 열세 살 아이리스가 ‘블루 55’라는 이름의 고래를 만나기 위해 할머니와 크루즈 여행에 오르고, 엄청난 의지와 능력을 발휘해 결국 고래와 조우하는(바닷속에서 단둘이!) 이야기다. 해시태그로는 ‘#청각장애#수어#고래#크루즈#할머니’로 나타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간략한 줄거리와 해시태그로 살펴본 바로는 두 책의 주제가 비슷하지 않고, 두 책의 접점도 없어 보인다. 열세 살 여성 청소년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주제, 주제어, 소재, 제재 등의 표면을 지나 좀 더 깊숙이 잠수해 들어가보면 서로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초콜릿어 할 줄 알아?>에서 나디마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재즈와 친구들이 휴대폰 번역기로 대화하려고 했지만 나디마가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알지 못하니 첫 시도는 실패. 그때 재즈가 자기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며 묻는다. “그럼 초콜릿어는 할 줄 알아?”(27면) 초콜릿과 로쿰의 교환으로 시작된 대화는 이모티콘 대화로 이어진다. 지도를 링크하며 집으로 초대하고, 음표 뒤에 물음표를 붙여 음악을 좋아하는지 묻고, 엄지손가락을 올린 이모티콘으로 좋아한다고 답한다. 춤, 독서, 영화, 영화관에서의 팝콘, 햄버거, 피자,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이모티콘 대화로 알게 된다. 언어로 소통하지는 못해도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 즉 ‘초콜릿어’가 우정을 이어주었다.

재즈는 나디마가 가리키는 사물의 영어 이름을 알려주고, 숙제를 함께하며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설정은 재즈에게 난독증이 있어 쉬운 맞춤법도 늘 틀리고 영어를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금세 영어를 잘하게 된 나디마는 재즈가 나디마의 동생 사미에게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지 못해 당황하자 그의 어려움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자기가 그림책을 읽어주겠다고 한다. 물론 재즈는 자신의 난독증을 제약이나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공한 사업가 중 엄청나게 많은 수가 난독증을 앓고 있다’(30면)며 그들 같은 사업가가 되길 꿈꾸고, ‘난독증 환자인 나는 도전을 즐긴다. 도전은 내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낸다’(56면)며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으로 긍정한다. 재즈에게 난독증이라는 언어 세계가 있듯 나디마에게는 쿠르드어라는 언어 세계가 있다. 완벽하고 능숙한 영어에 포섭되지 않은 이들 각자의 언어 세계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난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재즈는 나디마 가족을 도우려는 마음이 앞서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는 잘못을 저지른 후에야 진정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은 훌륭하지만, 남들이 네가 대신 나서서 싸워 주길 바랄 거라 넘겨짚는 건 곤란해. (중략) 나디마네 가족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한 일들과 재난에 맞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야. 그분들이 필요한 건 우리의 우정과 지원이지 적선이 아니란다.”(242면) 우정에 필요한 언어는 그와 같다. 영어를 못하는 나디마가 초대에 감사하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안녕하세요. 저는 나디마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아름다운 집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80면)라고 마치 연설 같은 문장을 외우고 연습해 말한 것, 나디마 가족이 죽은 친척들을 뒤로하고 시리아를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재즈가 나디마 엄마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한 것, 그것이 바로 우정의 언어인 ‘초콜릿어’다.

나의 고래를 위한 노래 린 켈리 지음 | 강나은 옮김 | 돌베개 | 2020년

<나의 고래를 위한 노래>에서도 두 개의 언어 세계가 등장한다. 농인의 수어와 청인의 구어다. 25년간 교실, 병원, 크루즈(!) 등 곳곳에서 수어 통역사로 일한 작가는 수어의 세계를 아름답고 세밀하게 작품에 담아내며 청인의 무지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고 낱낱이 부순다. 주인공 아이리스에게 수어는 청각 ‘장애’나 구어 능력의 ‘결여’를 보완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되고 독립된 또 하나의 언어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언어는 청인의 언어와 충돌한다. 청인인 부모의 의지에 따라 청인 학교에 다니는 아이리스는 자신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어 날마다 단절감을 겪는다. 학교에서 온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수어 통역사 선생님밖에 없다. 집에서도 늘 수어를 제대로 못하는 아빠에게 장벽을 느끼며 의사소통을 체념하고 만다. 한편 농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의 수어는 너무 빨라 알아듣기 힘들다. 학교 수업에서 아이리스는 라임에 맞춰 시를 쓰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아이리스가 쓴 시의 라임은 수어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청인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아이리스 시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시는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하던 수어 이야기 놀이에서 가져온 것이다. 누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음 사람이 받아서 잇는 식으로, 번갈아가며 수어로 이야기를 짓는 놀이다. 중요한 건 이야기 내내 같은 손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주먹 쥔 손을 썼다면 그 뒤로도 계속 주먹 쥔 손이 들어가는 수어를 써야 했다.”(16면)

아이리스의 마음은 과학 수업에서 알게 된 ‘블루 55’라는 고래에게 가닿아 비로소 활짝 피어난다. 대개 고래는 35㎐ 이하인 주파수의 소리를 내는 데 비해 블루 55는 55㎐의 소리를 내는 고래다. 여느 고래와 언어가 다르니 고래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서 온 바다를 유영한다. 블루 55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줄 방법을 찾던 아이리스는 학교 오케스트라의 도움을 받아 55㎐의 노래를 완성한다. 그 노래를 해양보호구역의 연구원에게 전했고, 결국엔 자신이 블루 55에게 직접 들려주기 위해 알래스카로, 다시 오리건주의 올리버곶으로 고래의 길을 따라간다. “자신의 노래와 비슷한 노래가 들려온다면, 블루 55는 그렇게 외롭지 않을 거예요”(99면)라는 아이리스의 말은 자신에게 전하는 위로와 격려처럼 들린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루 솔로몬 지음 |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초콜릿어 할 줄 알아?>와 <나의 고래를 위한 노래>는 주제나 소재로는 아니지만 두 작품을 묶을 수 있는 또 다른 고리가 있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언어 세계를 지닌 존재가 연결되고 만나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난독증, 난민, 농인과 청인, 다른 주파수로 노래하는 고래까지…. 비단 그들이 아닌 우리 각자의 노래 역시 저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초콜릿과 로쿰을 교환하고, 주파수를 맞추었듯 차이를 넘어 서로의 노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차이’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차이에 의한 각각의 경험이 해당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고립시킬 수도 있지만 그들이 모이면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의 투쟁은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준다. 이례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오히려 완벽하게 정상인 것이 드물고 고독한 상태다”(<부모와 다른 아이들 1>(열린책들, 2015, 23면)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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