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감옥’서 익명 앱으로…스마트폰 뒤 숨은 학폭, 더 다양하고 교묘해졌다[끊이지 않는 학교폭력]
“어떤 유형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다 신고 접수가 많이 들어와서 조사가 이뤄질 때쯤에는 다시 뜸해집니다. 갈수록 새로운 유형이 생겨나니 ‘애들이 어떻게 이런 것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학교폭력 신고를 받는 이주녕 서울경찰청 117센터 팀장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학교폭력 양상은 더욱 다양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학교폭력 공간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거쳐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와 가상현실로 옮겨왔다. 최근에는 전동킥보드 앱과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2~3년 뒤에는 어떤 새로운 유형이 생겨날지 전문가들도 쉽게 예측하지 못한다.
사이버 학폭 대두된 2010년대에는
카카오톡 채팅방 언어폭력이 많아
코로나 이후 ‘딥페이크 능욕’ 등
새로운 유형의 사이버 폭력 유행
중고거래 플랫폼·킥보드 앱 활용
익명화돼 입증·추적 어려워져
기술 발달 따라 진화하는 사이버 폭력
학교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푸른나무재단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2022년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 학교폭력 유형 중 사이버 폭력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급속히 바뀌는 양상 탓에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사이버 학교폭력이 대두되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 당시에는 단순한 언어폭력이 주를 이뤘다.
카카오톡 채팅방에 초대한 뒤 단체로 피해자에게 욕을 하거나(떼톡), 단체채팅방에서 피해자를 유령 취급하는 경우(카톡 유령)가 많았다. 피해자가 견디지 못해 채팅방을 나가면 반복해서 초대해 괴롭힘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2020년 코로나 이후 비대면 활동이 늘어나면서 사이버 폭력의 유형도 달라졌다. 카카오톡뿐 아니라 다양한 메신저와 비대면 앱을 이용한 폭력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피해자의 얼굴을 특정 영상에 합성하는 ‘지인 능욕’이 대표적인 예다. SNS상에서 ‘지인을 능욕해준다’는 게시글에 연락해 지인의 사진을 보내면 음란물에 지인의 얼굴을 합성해 유포하는 식이다.
익명 플랫폼을 이용한 사이버 폭력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초등학교 6학년 A는 누군가 자신을 험담하는 글을 익명 플랫폼에 게시한 것을 발견했다. A는 교사에게 알렸지만 작성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익명 플랫폼은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글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3~4일쯤 뒤에 또 다른 험담 글이 올라오자 A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결국 해당 화면을 캡처해 학교폭력으로 신고했다.
이주녕 117센터 팀장은 20일 “학생들이 ‘에스크’ 등 익명 플랫폼을 많이 이용하다 보니 이런 곳에서 발생하는 학교폭력 유형이 많다”며 “점점 수위가 심각해지는 추세”라고 했다.
최근에는 전동킥보드 등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학교폭력이 늘고 있다. 피해 학생 명의로 전동킥보드를 빌린 뒤 자신이 이용하고 비용은 피해자에게 청구하는 식이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협박에 못 이겨 킥보드 결제에 필요한 정보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학생이 가진 명품 신발이나 가방을 중고물품 거래 앱에 올리게 한 뒤, 반값에 팔게 하거나 돈을 주지 않고 물건을 넘기게 하는 수법도 빈번하다.
하동진 서울청 아동청소년계장은 “이전에는 공개된 온라인 플랫폼에서 가해자가 특정되는 사이버 폭력이 많았다면, 이제는 익명화돼 입증·추적이 어려운 형태로 학폭이 변화하고 있다”며 “중고거래 플랫폼이나 킥보드 앱 등을 활용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한 번 온라인에 게시된 내용은
계속 복제·유통돼 2차 가해 우려
가해자를 특정하기도 어려워져
피해자가 복수심에 또 다른 가해
악순환의 고리 이어지는 문제도
전문가들 “플랫폼 책임 강화돼야”
‘2차 가해 무방비’ 인식·제도는 느슨
전문가들은 사이버 폭력이 위험한 이유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꼽는다. 학교·학원 등 학생들이 모이는 곳에서 이뤄지던 기존 학교폭력과 달리 사이버 폭력은 피해자가 어디에 있든 일어날 수 있다. 전종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전의 학폭은 학교에서 나와서 집에 오면 좀 분리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24시간 동안 폭력이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2차 가해가 이뤄질 가능성도 크다. 한 번 온라인에 게시된 내용은 계속 복제·유통될 수 있다. 설령 처음 게시된 글이 삭제되더라도 피해자가 안심할 수 없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SNS가 발달된 나라에서는 한 번 피해를 보면 전학을 가더라도 피해가 다 알려지게 된다”며 “피해자에게는 학교폭력 사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는 것이 트라우마로 작용해 향후 대인관계·진로에서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해자를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 온라인상에 한 번 유포되고 나면 가해자의 범위도 급속도로 넓어지기 때문이다. 익명성을 보장받는 커뮤니티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가해자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설사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더라도 피해를 입증할 증거가 없으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김석민 푸른나무재단 상담본부 팀장은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오히려 피해 학생이 신고한 것에 대해 가해자가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겁박하는 때도 있다”며 “결국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쉬쉬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가·피해자가 혼재되는 양상도 처벌을 어렵게 만든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1년 사이버 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이버 폭력 가해자를 대상으로 동기를 묻자 36.8%가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답변했다. 사이버 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심리상태를 조사한 결과 34.1%는 ‘가해자 복수’라고 답변했다. 전 교수는 “과거에는 가해, 피해, 방관이 구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피해자가 복수심에 불타서 제3자에게 가해를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사이버 폭력’에 대한 인식 개선과 제도 보완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 교수는 “시작은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더라도 이후에 오프라인까지 이어져서 금전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학생들 사이에서는 ‘카카오톡에서의 언어 모욕 정도는 폭력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좀 있는데, 사이버 폭력의 심각성을 제대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단순히 물리적인 분리를 떠나 SNS나 인터넷으로 접촉하지 못하게 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플랫폼의 책임이 강화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김석민 팀장은 “전동킥보드 등 사이버 폭력 수단으로 사용되는 앱에 대한 모니터링이 수시로 이뤄져야 한다”며 “신고가 들어가도 개인정보를 이유로 제대로 확인을 안 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플랫폼이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송이·김세훈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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