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 “그랜드바겐 초입”…실패 자인한 윤 대통령의 전략
대통령실 “뭘 할 테니 이걸 해다오 안 했다”…‘퍼주기’ 인정
역대 정부들이 지켜온 과거사·현안 분리 ‘투 트랙’도 무너져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결과는 대일 외교 기조로 밝혔던 ‘그랜드바겐’ 전략의 폐기를 드러냈다. 과거사, 경제, 안보 분야를 망라해 한번에 ‘크게 주고받는’ 협상은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징용) 배상 문제에서 일본에 ‘면죄부’를 줬지만 일본의 호응은 추후 ‘기대 사안’으로 미뤄뒀다. 그랜드바겐 전략도, 과거사와 현안을 분리한 역대 정부들의 ‘투트랙’ 전략도 무너졌다는 지적이 불가피해 보인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20일 “큰 틀에서 그랜드바겐 초입으로 이해해달라”고 밝혔다.
그랜드바겐 전략은 ‘정치인 윤석열’이 처음 밝힌 한·일관계 구상이자 취임 후에도 재확인한 기조다. 윤 대통령은 2021년 6월29일 정치참여를 선언하며 “이(문재인) 정부 들어 망가진 위안부 문제 또 강제징용 문제 이런 것들과 한·일 간 안보협력이라든가 경제, 무역 문제 등 현안을 전부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랜드바겐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 영역에서 그랜드바겐은 일괄타결 형식의 협상을 말한다. 이 구상은 자칫 과거사 문제의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경제·안보와 연계해 협상 대상으로 삼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도 “한·일관계 회복에서 그랜드바겐 방식으로 미래지향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며 이 기조를 재확인했다.
결과적으로 한·일 정상회담에서 그랜드바겐은 없었다. 국내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은 일본의 사죄·배상 없는 강제징용 해법을 선제적으로 내줬다. 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풀기로 했고, 한국은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정상화하기로 했다. 일부 조치들을 주고받았지만 한국 측의 실익은 적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전략이 가동되지 않은 것은 대통령실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18일 언론 인터뷰에서 “주고받기식이 아니라 먼저 한국이 해나갈 일을 해나가겠다”, “우리가 하나 뭘 할 테니 일본 정부는 이걸 해다오 하는 접근을 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관계 개선의 ‘마중물’ 차원에서 한국이 선제적으로 일본의 강제징용 문제 부담을 덜어주면서 일본의 추후 호응을 기대한다는 뜻으로 그랜드바겐과는 차이가 있다.
대통령실은 그랜드바겐에 못 미친 회담 결과를 윤 대통령의 ‘대승적 결단’으로 띄우면서 일본 정부의 후속 조치는 한국의 선제적 조치에 따라 향후 기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정상 간 대화를 공개할 순 없지만 두 정상이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을 크게 풀어야 한다고 했고 일본 측 호응도 있던 것으로 안다”면서 “앞으로의 조치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보자면 (전략 수정이라기보다는) 그랜드바겐의 초입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가 지켜온 ‘투트랙 전략’은 윤석열 정부 들어 이미 무너졌다.
진보·보수 정부를 가리지 않고 대체로 역대 정부는 일본의 명확한 과거사 인식과 미래지향적 협력을 분리하는 것을 대일 외교 기조로 삼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올바른 과거사 인식과 미래 협력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함께 등장한 것도 이를 반영했다.
윤 대통령은 정치 참여 선언 당시엔 “한·일관계는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후대가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진상을 명확히 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실용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3·1절 기념사에는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다”는 메시지만 담았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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