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칼럼] ‘검사 윤석열’의 짜장면, 그리고 69시간 노동
2000년대 초 대검찰청에 출입할 때다. 중앙수사부에서 대형 사건 수사에 돌입하면서 기자들도 자정 무렵까지 야근을 했다. 난방은 일과시간 이후 꺼졌다. 밤마다 온몸을 오므린 채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수사가 끝난 뒤 남은 건 딱딱하게 굳은 어깨였다. 휴대전화를 들어올리기 어려워, 고개를 전화기 쪽으로 기울여 통화하는 지경이 됐다. ‘주 69시간 노동’을 허용하겠다는 정부안을 보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주 6일, 하루 11~12시간 일했다. 주당 66~72시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시절 로펌으로 이직했다가 1년 만에 검찰에 복귀했다. 2021년 7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배경을 털어놨다. “대검에 들어갈 일이 있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철가방’의 짜장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검사로 일할 때, 서울지검 앞 중국집에서 아점으로 짜장면을 시켜 먹었어요. 막 비벼서 먹으려고 하면 부장이나 3차장이 찾아요. 보고하고 오면 짜장면이 불어 있죠. 끓인 물을 부으면 곱배기가 되는데, 밤새 못 먹었으니 얼마나 맛있겠어요. 검찰이 그리웠던 거예요.”
‘윤석열 세계관’의 핵심에는 검찰이 있다. ‘솔푸드’도 검찰청 앞 중국집 짜장면이다. 윤 대통령이 떠올리는 노동의 전형도 ‘검사노동’일 가능성이 크다. 과거 검사노동의 특징은 윤 대통령이 묘사한 대로다. 큰 사건 수사가 시작되면, 검사와 수사관들은 청사에서 24시간을 보냈다. 고용노동부가 역설하는 ‘바쁠 때 몰아서 일하기’다. 기소와 브리핑까지 마치고 나면, 조금 한가해졌다(제주도 한달살기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안은 ‘검사 윤석열’의 향수 어린 짜장면과 무관할까.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 맘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어록을 남긴 바 있다.
프랑스에선 마크롱 대통령이 정년 연장을 추진하자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를 지지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는 묻는다. “우리는 오로지 자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겁니까?”(리베라시옹 인터뷰)
윤석열 정부는 주 69시간 노동을 ‘선택의 자유’ 회복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선택도, 자유도 아니다. 근대 민주국가에서 노동시간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노동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듯한 조치가 결과적으로 자본의 선택권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청년 착취의 주범’으로 몰지만, 지금 청년·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착취하는 게 누구인가.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연차휴가 사용 현황을 물어봤더니, 법정 연차휴가(최소 15일)를 다 못 쓴 노동자가 10명 중 8명꼴이었다. 연차를 못 쓰게 한 주체가 노조인가, 사용자인가.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생명권·건강권·행복추구권과 직결된다. 장시간 노동은 개별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 가족과 사회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였다.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바로 메이데이(May Day·노동절)의 기원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19년 ‘하루 8시간, 주 최대 48시간 노동’을 규정한 제1호 협약을 채택했다. 아직도 69시간 운운하는 건 수치다. 죽어라 일하다가는 진짜 죽을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은 그럼에도 노동시간 연장에 미련을 못 버리는 듯하다. 대통령실에선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16일 안상훈 사회수석)라더니, 20일 “(주 60시간은) 가이드라인이 아니었다. 60시간이 아니고 더 이상 나올 수도 있다”(고위 관계자)고 말을 바꿨다. 노동시간이 쇼핑몰에서 파는 상품이라도 되나. ‘디스카운트’해주려다가 마음을 바꾼 건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에서 한국 노동자가 희망하는 주당 노동시간은 36.7시간이었다. 윤 대통령이 짝사랑하는 ‘MZ세대 노조’(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역시 정부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한국노총·민주노총 중심 노동운동과 MZ노조의 ‘갈라치기’를 시도해왔다. 하지만 노동자는 노동자다. 노동자 간 차이가 크다 한들, 노동자와 사용자 간 격차보다 클 리 없다.
지금은 서울중앙지검의 MZ 검사들도 불어터진 짜장면을 좋아하지 않을 거다. 온 국민이 사랑하는 짜장면은 퇴근 후 각자 먹기로 하자. OTT 보며 혼자 먹든, 가족과 함께 탕수육까지 곁들이든.
김민아 논설실장 ma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혁신당이 ‘김정숙 특검법’ 내는 국힘에 “쌩쑈”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 서울 분양가, 평당 1억 넘겼다···‘역대 최고’ 지붕 뚫은 지자체 6곳 어디?
- “강형욱, 직원들 최고대우···욕설도 안해” 전 직원의 입장
- 성일종 “윤 대통령 지지율? 인기 없는 엄격한 아버지 모습이라 그래”
- 윤 대통령 21% 지지율에...홍준표 “조작 가능성” 유승민 “정권에 빨간불”
- 잘 가라 ‘세단’…온다, 전설이 될 ‘새로운 기준’
- [단독] 세계유산 병산서원 인근서 버젓이 자라는 대마…‘최대 산지’ 안동서 무슨 일이
- 아이돌 출연 대학 축제, 암표 넘어 ‘입장도움비’ 웃돈까지…“재학생 존 양도” 백태
- 출생아 80% 증가한 강진군의 비결은…매월 60만원 ‘지역화폐 육아수당’
- 음주운전 걸리자 “무직” 거짓말한 유정복 인천시장 최측근…감봉 3개월 처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