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화가들의 갤러리가 된 카페···동네에서 ‘느리게 보는 그림’[현장에서]

김보미 기자 2023. 3. 2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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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커피숍에 ‘청년 갤러리’에 선정된 김이린 작가의 ‘백화점에 간 나무’가 전시돼 있다. 서초구 제공

서울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우면산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있는 커피숍 ‘오페라빈’은 주민들이 자주 찾는 동네 가게다. 지난 16일 오후 아파트 단지와 공원으로 둘러싸인 방배동 아지트의 문을 열자 중장년 단골들이 북적였다. 손님들 뒤쪽으로는 벽돌 벽면과 대비돼 도드라지는 색감의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김이린 작가의 작품이다.

김 작가는 “일상 공간은 전시장과 달리 그림이 주변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변주할 수 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앉아서 감상하는 관람객과 작가가 접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청년 예술가는 전시 공간을, 주민은 일상 속 그림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서초구가 시작한 ‘청년 갤러리 카페’는 올해 5회째를 맞았다. 2019년부터 전시장 역할을 해온 이 커피숍에는 올해 봄 ‘백화점에 간 나무’ ‘수영장에 간 나무’ ‘피자를 좋아하는 나무’ 등 나무를 주제로 한 김 작가의 그림 4점이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로 곳곳에 자리 잡았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커피숍에 ‘청년 갤러리’에 선정된 김이린 작가가 벽면에 전시된 ‘봄을 상상하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초구 제공

유영희 사장은 “그림을 좋아해도 갤러리까지 자주 찾기는 어려운데 카페에 그림이 항상 걸려 있으니 오래 두고 볼 수 있어 (단골손님들의) 만족도가 크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 3년은 작가들에게 암흑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 시간은 창작 활동의 최종 목표가 ‘판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고 한다. 재택근무 등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인테리어 산업이 활황을 맞아 그림 시장이 성장할수록 관람객과 함께하는 공간에 대한 갈증은 더 커졌다.

3년째 카페 전시에 선정된 김 작가는 “사람과 만나고 전시된 작품을 봐야 다음에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어 전시 공간이 간절했다”며 “특히 갤러리 카페 전시는 친구, 가족이 동네를 오가며 내 작품을 우연히 발견하는 과정도 있어 지역성을 반영한 그림도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마을버스 정류장에 ‘청년 갤러리’에 선정된 정성원 작가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서초구 제공

지역성으로 차별화된 카페 갤러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올해 만 19~39세 청년 작가 60명을 모집하는 데 140명이 지원했다. 전공자들뿐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을 그리는 청년, 출산·육아로 일을 하지 못하는 여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출품작은 미대 교수와 예술의 전당 관계자, 큐레이터의 전문적인 평가를 거쳤다. 선정 작가 60명은 연말까지 서초구 내 카페 20곳에서 3회로 나눠 3개월씩 각자의 개인전을 연다.

올해는 마을버스 버스정류장 광고판 20곳에도 작품이 전시돼 거리를 오가는 주민들도 지역 예술가들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올해 청년 갤러리 지원자 중 20%가 발달장애인이었고 이들 중 12명이 최종 작가 60명에 포함됐다. 발달장애가 있는 박성연 작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전시 기회를 얻었다. 박 작가의 그림 ‘희망1’ ‘희망2’는 방배동 카페 ‘쫀득당’에 걸렸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신이 가장 편한 공간인 집을 주제로 한 박 작가의 그림은 가게의 보라색 배경과 어울려 밝은 갤러리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박 작가의 어머니 이경애씨는 “소재와 색감을 수없이 고민한 뒤 수백 번의 붓 터치로 그림 한 점을 완성한다”며 “작가가 행복해하며 터치한 흔적들을 관람객들이 자세히 볼 수 있는 공간이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커피숍에 ‘청년 갤러리’에 선정된 박성연 작가의 ‘희망1’이 전시돼 있다. 서초구 제공

동네 곳곳에서 ‘개인전’을 치른 작가들의 작품은 연말 한 공간에 모여 ‘단체전’도 갖는다. 각자 활동하는 청년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지 않고 ‘청년 작가’들의 통합 전시라 더 특별하다.

이씨는 “박 작가는 학교에서 특수반을 다니고 복지관에서 장애인들과만 어울렸는데 지난해 단체 전시를 하며 이 같은 구분 없이 전시장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며 “자존감이 높아져 다음 창작을 하는데 힘을 얻었다”라고 전했다.

지난 4년간 청년작가 170명의 작품 500여점이 동네 카페에 전시됐다. 이 중 30점은 카페를 방문한 고객에게 판매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수익금 약 1500만원은 모두 작가에게 돌아갔다.

서초구 관계자는 “선정된 작가들에게는 1인당 50만원 활동비도 지원한다”며 “카페와 마을버스 정류장에 전시된 작품을 소셜미디어(SNS)에 인증하는 이벤트도 진행해 더 많은 주민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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