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대법관(Justice)이 말하는 형사법원의 자세와 자아비판

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2023. 3.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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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결론이 유죄이건 무죄이건 가리지 않고 형사판결에서 걸핏하면 인용되는 문구가 있다. 교과서에서도 늘 언급되는 말이며, 법조인은 말할 것 없고 이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법리(法理)이기도 하다.

"형사재판에서 범죄사실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검사의 입증이 위와 같은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도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비록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등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사실 저 말만 잘 따르면 형사재판이 제대로 되지 않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핵심적인 형사법의 대원칙이자 반드시 지켜져야만 할 헌법상의 원칙을 선언하는 내용인 것도 분명하다. 현실은 어떠한가? 별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위와 같은 원칙이 천명된 헌법과 형사법을 운용한지 무려 63년이나 지난 2011년에 어느 대법관은 다음과 같은 말로 고등법원 항소부의 판결을 파기했다.

"법원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 검사의 공소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에서 보이는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에는 애써 눈감으면서, 오히려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에는 불신의 전제에서 현미경의 잣대를 들이대며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형사법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은 심리과정에서 선입견 없는 태도로 검사와 피고인 양편의 주장을 경청하고 증거를 조사하여야 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헌법상 요구되는 형사재판의 원리인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여야 한다."

꽤나 오래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바로 이곳 대전이 고향인 어느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던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문구인데, 필자가 틈틈이 찾아 읽는 판시다. 좋아하고 감동해 마지않는 판결이지만, 대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필자 생각으로, 다음과 같이 후배 법관들을 질책하는 말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建國) 후 60년이 지나도록 늘 강조하지 않았더냐.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는 한, 형사법원은 피고인 말의 진위 혹은 수미일관성을 따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피고인의 말이 전후 모순되고 조변석개하여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사가 제출하는 증거를 통하여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신을 얻어야만 비로소 유죄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법원은, 형사법관들은, 범죄자로 의심을 받고 있는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는 함부로 믿을 수 없다는 굳건한 선입견을 가진 채로 현미경을 들이대서 검사한 다음, 그렇게 하여 '발굴'해 낸 모순과 의문이라는 것들을 들이대면서 너무나 쉽게 유죄판결을 하고 있다. 오히려 현미경을 들이대어 확인해도 시원찮을, 검사가 낸 증거에 들어있는 여러 불일치와 모순, 의문에는 애써 눈감고 있다. 이런 법원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공평한지, 공정한지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바로 그 '형사법원'의 하나가 바로 필자다. 그러니 이러한 판시를 보고 어찌 부끄럽고 두렵지 않겠는가? 혹시 나야말로 검사의 주장과 증거들에서 보이는 불일치·모순·의문에는 눈감으면서, 오히려 피고인의 주장·증거에는 불신의 전제에서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절대 아니라고 답해야 마땅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그 결과 일국의 대법원 판결이 깃털의 무게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접을 받는 이 저녁에 목 놓아 울지는 못하지만, 우연히 열린 판례검색창에서 쏟아지는 추상같은 대선배의 질책을 읽으면서 단지 부끄러워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원칙으로 돌아가서 공평하고 공정한 법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그래야 그 깃털은 오시리스의 저울에 올린 타조깃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것인지 회의를 거두지 못하지만, 적어도 법관으로 남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자아비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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