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기계나 노예 아냐”…올해도 차려진 ‘이주노동자 분향소’

전지현 기자 2023. 3. 1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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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종차별 철폐의날’ 앞두고 인권 보장 등 촉구
서울역 광장에서 19일 열린 2023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날(3월21일) 기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이주민의 평등과 자유, 안전 보장을 촉구하며 ‘인종차별’이란 단어가 크게 적힌 대형 현수막을 찢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이주공동행동)은 ‘2022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날(3월21일)’을 이틀 앞둔 19일 서울 중구 서울역광장에서 ‘이주민의 평등·자유·안전 보장’을 촉구하는 기념대회를 열었다.

이날 현장에는 지난달 전북 고창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서 불을 피웠다가 질식해 사망한 태국인 부부와 이달 경기 포천의 한 돼지농장에서 10년간 일하다 숨진 태국인 프라와세낭 분추를 위한 분향소가 차려졌다. 작은 향로와 촛불들, 영정으로 꾸려진 약식 제단에는 국화꽃 30여송이가 놓였다.

세 사람은 모두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분추의 죽음은 농장주가 숨진 그의 시신을 야산에 유기한 것이 알려지며 드러났다. 분향소에는 “이주노동자는 기계나 노예가 아니다”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하라”는 손팻말이 놓였다. 이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네팔인 라만(35)은 기자와 만나 “정당하게 일하러 왔다가 비자 문제로 어려워지는 친구가 많다”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는 말도 공감된다”고 했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은 대회에서 “지금은 21세기”라며 “미등록 노동자가 돼지우리 숙소에서 죽어 야산에 버려지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 노동자로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촉구했다.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이주민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대구 북구의 이슬람사원(모스크)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단체가 공사장 앞에서 이슬람 신도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바비큐 파티를 벌인 일이 대표적인 문제 사례로 거론됐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경북대 학생 압둘예킨 아데비시는 녹음된 발언을 통해 “민주적인 시스템을 갖춘 한국에서 왜 그들이 종교 활동을 하는 예배 장소 건설을 방해하는지 의문”이라며 “이는 분명히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밝혔다.

이주민들은 자신이 차별당한 경험을 나누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온 전지수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활동가는 “부모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폭력을 당하는 2세들에 대한 얘기가 종종 들려온다”고 했다. 다문화가정 2세인 박찬빈군은 “한 친구가 중국어 단어를 묻길래 찾아보니, 코로나 이후로 중국에서 온 이주민을 혐오하는 의미를 담게 된 단어더라”고 했다. 그는 “차별의 언어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단체들이 공동으로 연 이날 행사엔 주최 측 추산으로 시민 200여명이 모였다. 행사 후 이들은 ‘인종차별’이란 단어가 적힌 천을 찢고,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국가인권위원회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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