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신자유주의자다

한겨레 2023. 3. 19. 19: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세상읽기]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막을 수 없었을까? <다음 소희>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소희’가 갔던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고 있다. 특성화 고등학교의 현장실습을 폐지하면, 현장실습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을 개정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보단 나아질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존엄을 짓밟는 일자리를 쏟아내는 성장 방식을 그대로 두고, 그 성장 방식이 만들어낸 일자리가 아니면 먹고살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그대로 둔 채, 제도 몇 개를 개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거릿 대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규제를 풀고 대기업과 부자의 세금을 깎아주며,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고 공적 복지를 최소화해 삶의 책임을 개인과 시장에 넘기는 신자유주의 말고는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대안은 없다”고. 우리는 지난 40여년간 그 ‘대안은 없다’는 세상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누군가 ‘처음 소희’가 되었을 때도, ‘처음 소희’가 ‘다음 소희들’로 무한 증식되어 점점 더 거대한 파도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안은 없다”에 맞서 “대안은 수천 가지”라고 외쳤지만, 그 외침은 무기력했다. 신자유주의에 저항했던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의 사민주의자도 결국 신자유주의의 품에 안겼다. 아니, 심지어 서유럽의 사민주의자는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새로운 교리로 삼았다.

영국에서는 ‘신노동당’의 블레어가 신자유주의의 화신인 대처를 계승했고, 프랑스에서는 미테랑의 사회당 정부가 혹독한 긴축을 실행했다. 독일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킨 일등 공신은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였다. 스웨덴 사민당 정부는 보수도 하지 못했던 세기의 개혁이라 불리는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엄청난 감세를 실행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공기업을 민영화했던 정권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였다.

비판은 있었다.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수많은 비판을 쏟아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현실은 그 비판보다 더 참혹했다. 지난 40년 동안 불평등과 사회적 배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일자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경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해졌다.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얼굴을 바꿔가며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왜 생명을 다한 신자유주의가 죽지 않고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떠도는 것일까? 답은 분명하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대안 없는 분노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야기한다. 대안 없이 대공황을 맞이한 세상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목도해야 했다. 1970년대 위기를 넘어설 대안을 갖지 못한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길을 내줘야 했다.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참담한 세상을 바꿀 대안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누군가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우리가 뭐라고 했는지. “맞아,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필요해. 하지만 쉽지 않아. 5년짜리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천천히 고민하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연인원 1700만명의 시민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정권을 바꿨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던 이유였고, 민주주의와 기본권을 유린했던 무도한 세력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좀비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젠 머뭇거리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의 역량이 부족해도, 우리가 만든 대안이 불완전해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얼굴만 바꾼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수많은 ‘다음 소희’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안 없는 세상은 그 자체가 재앙이다. 근본적 개혁을 외면할 때 우리는 모두 신자유주의자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