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섭의 기업과 경제] SVB 사태는 경직된 금융규제의 실패

2023. 3. 1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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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채권을 '시장가치'로만
반영하게 한 규제의 경직성이
안해도 될 유동성 지원 불러
'채권의 배신'이 아니라
'금융규제의 배신'이 본질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국제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중소 은행들, 크레디트스위스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고, 골드만삭스 금리거래 사업부나 로크스 등 대형 헤지펀드들이 손실을 보면서 파장이 어디까지 번질지 불안감이 커진다. 원인과 대책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도 뜨겁다.

많은 사람들이 SVB의 잘못을 탓한다. 전통 은행과 달리 스타트업같이 행동하면서 조직이 느슨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금융 규제를 완화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융 안전지대가 없다"며 위험 관리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경직된 금융 규제의 산물이고 금융당국이 규제를 유연하게 조정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SVB 파산의 핵심에는 '시장가치평가(Mark-to-market)'라는 금융 및 회계 규제가 있고 따라서 재무 상황이 괜찮은데도 '장부상 손실'을 실제 손실로 처리해 메워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SVB의 주 고객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다. 저금리가 지속됐던 지난 수년 동안 이들엔 투자금이 몰려들어 왔다. 이들은 그 돈을 은행에 예치했고 대출받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 SVB는 예금을 받았지만 대출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돈을 안전한 채권에 대거 넣었다.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이 총자산의 55%가량을 차지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파생상품 투자 때문에 벌어졌던 것과 달리, SVB는 주어진 상황에서 보수적으로 경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금리를 급격히 올리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예금 금리도 따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채권 금리가 고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예금 금리만 올랐다면 SVB는 이익이 줄든지 일부 손해를 보는 선에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유 채권을 '시장가치'로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채권에서 20% 이상 손실을 입게 됐다. 안전한 채권이기 때문에 만기까지 들고 있으면 손실 없이 원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손실로 처리하고 부족분을 은행채를 발행해서 메우려 했다. 은행채 발행에 실패하고, 채권을 발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SVB에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되면서 예금주들이 돈을 마구 빼가는 '뱅크런'이 발생했다.

만약 한국 금융당국이었다면 SVB에 대한 규제를 일시 완화해주는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로 작년 가을 흥국생명이 콜옵션 지급 불능 사태에 빠졌을 때는 보험사 건전성 평가 기준을 완화해주면서 콜옵션이 행사되도록 도와줘 채권시장의 불안을 제거했다. 미국 정부도 사태가 커지니까 뒤늦게 행동을 취했다. 위기 은행들이 국채와 MBS를 내놓으면 100% 가치로 평가해서 현금을 내주겠다는 것이다. 지난 한 주 동안에만 미국 정부는 은행들에 1500억달러가량의 긴급 유동성을 지원했고 1500억달러가량의 지급보증을 해줬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지원액의 절반가량을 벌써 소진했다.

만약 미국 금융당국이 선제적으로 감독 기준을 완화해서 SVB를 돌아가게 해줬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돈이다. 금융 불안도 지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태를 '국채의 배신'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금융 규제의 배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이 자국 인플레이션만 바라보면서 금리를 급격히 올릴 때 1차 피해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를 따라 올려야 하는 신흥국들이 입었다. 미국은 자국 금융시스템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급격한 금리 상승은 경직된 규제와 결합되어서 미국 금융을 속에서 파열시키고 있다. 미국 은행들이 국채에서만 입은 장부상 손실은 6500억달러(약 85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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