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펀드의 공습
주총 앞둔 기업들 '당혹'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자본시장의 상수로
기업은 소통하고
정부는 보완책 마련을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은 2013년 애플 주식을 대량 매수해 월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애플뱅크'로 불릴 만큼 현금을 쌓아둔 점을 노렸다. "자사주를 매입하라"는 아이칸의 서한이 공개될 때마다 주가는 치솟았다. 아이칸은 애플카가 2020년이면 나올 것이라며 "주가가 저평가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2016년 돌연 '차이나 리스크'를 언급하며 애플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고 공개했다. 3년 만에 아이칸은 대략 20억달러의 차익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행동주의 펀드 서드포인트는 지난해 여름 디즈니의 주식 보유를 공개한 후 스포츠채널 ESPN을 분사시키라고 압박했다. 디즈니는 분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사진 쇄신을 약속하며 서드포인트와 가까스로 합의했다.
'기업사냥꾼'으로도 불리는 행동주의 펀드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그들만의 영역과 투자 전략을 확고히 구축했다. 단기 수익률에 열광하는 투자자와 거대 자금이 몰리면서 행동주의 펀드 영향력은 날로 커지는 추세다.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가치를 명분 삼아 변화를 이끌어 내곤 하지만, 기업가치가 실제로 높아질 때까지 장기간 기다리진 않는다. 아이칸이 애플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지만, 애플카 없이도 애플은 2020년 시가총액 1조달러를 넘은 후 2조달러, 3조달러를 찍었다. 아이칸이 장기 투자자로 남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손에 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투자는 아이칸이 아닌 워런 버핏의 몫이다.
한국 자본시장도 과거 행동주의 펀드로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다. SK와 소버린(2003년), 삼성물산과 엘리엇(2015년), 현대차와 엘리엇(2018년) 대결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의 주식 매입이 알려질 때마다 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그만큼 덜 준비돼 있었고,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올해는 한국 자본시장의 변곡점이라 할 만큼 행동주의 펀드가 전면에 등장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한국이 행동주의 펀드의 본격적인 사정권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뿐 아니라 토종 행동주의 펀드들이 대거 경영에 관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주주총회를 앞두고 배당 확대 같은 주주 제안은 기본이고 이사 교체나 사업부의 인수·분사 같은 민감한 경영 이슈를 들고나온다.
기업들은 볼멘소리지만, 이제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행동주의 펀드를 시장의 상수로 놓고 경영 활동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행동주의 펀드는 다양하다. 경영권을 노리는 곳도 있지만 1% 지분만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곳도 많다. 시장에서 우군을 확보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구조다. 이 때문에 시장과의 불통 기업은 타깃이 되기 십상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시장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한 경영 요소가 됐다. 공격적인 펀드의 요구가 없더라도 시장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했던 내부 관행들은 자연스레 개선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이 주주환원 시장친화 경영의 모든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는 경계해야 한다. 요즘 증시를 달구고 국가경제를 이끄는 2차전지와 관련 부품 소재는 수년, 수십 년간의 막대한 투자가 이뤄진 덕분이다. 경영진이 이익의 대부분을 배당과 자사주에 쏟아부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펀드의 입김이 날로 거세지면서 경영진 입장에서는 균형 잡힌 의사결정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보완하려면 정부 차원에서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황금주 같은 경영권 보호 제도 도입을 논의해야 한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착된 제도인 만큼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서둘러 받아들여야 할 때다.
[황형규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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