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수비여왕 "뛸 수 있는 하루하루가 소중"
시즌 중 감독을 경질했고, 감독대행만 2명이 팀을 스쳐 갔다. 그야말로 갈팡질팡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흥국생명은 여자 프로배구 무대에서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정규리그 1위에 올라 챔프 결정전에 직행했다. 경기 중에는 안정적인 수비로, 코트 밖에서는 든든한 맏언니 역할로 팀을 추스른 베테랑 리베로 김해란(39)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 응한 김해란은 "(김)연경이가 와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작년에도 6위에 그쳤기에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정말 1위를 할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결과적으로 개막 15연승을 달리는 등 초반 기세가 무서웠던 현대건설을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우승 대신 고민했던 것은 은퇴였다. '쌍포' 김연경과 옐레나가 있었음에도 권순찬 감독과 김여일 단장이 동시에 경질되며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김해란은 "시즌 중간에 더는 못하겠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가버리면 남은 선수들이 더욱 힘들겠다는 생각에 겨우 참았다"고 털어놓았다.
괴로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가족이었다. 축구선수 출신인 남편 조성원 문경 상무 코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만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을 정상에서 맞이해야 한다"며 힘을 불어넣어 줬고, 2020년에 낳은 아들 조하율 군은 운동하러 가는 엄마를 보채지 않았다.
김해란은 "친정엄마가 하율이를 봐주시는데, 엄마가 운동 간다고 하면 할머니랑 잔다며 받아들이더라. 너무 일찍 철들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크다"고 털어놓으며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돼야 한다. '우리 엄마야' 하고 자랑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다짐했다.
베테랑 동료들 역시 큰 힘이 되고 있다. 김해란은 "어린 선수들도 잘 버텨줬지만 개인적으로는 고참 선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연경이는 물론이고, 미들 블로커 (김)나희도 시즌 중반부터 자리 잡아 시합을 잘 뛰었다. 주장 (김)미연이는 언니들이 많아 고생도 많았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물론 그 자신도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마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수비(세트당 7.797)와 디그(5.609개) 부문에서 2위에 오르며 전성기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팀 동료들에게 감사를 받을 만하다. 새롭게 부임한 이탈리아 출신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은 "김해란은 서른 살 같다"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김해란은 자신의 경기력에 대해 손을 내저었다. 그는 "회복력이나 체력은 좋은 편이지만 부상도 있고 그래서 순발력이 예전만 못하다. 다 보이는데 발이 안 갈 때가 생기더라"며 "요즘 좋은 리베로가 많은데 나랑 아홉 살 차이 나는 현대건설 (김)연견이를 두고 '내가 그 나이 때는 날아다녔다'며 장난 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29일부터 챔피언결정전에 돌입하는 그는 "시합은 해봐야 아는 거고, 컨디션 등 고려할 일도 많기에 평소 꼭 이기겠다고 얘기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하고 싶으니 100%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승하고 은퇴를 선언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은퇴 얘기가 나오자 김해란은 "남편이 지도자가 되고 나니 선수 때가 제일 시간도 많고 편하다고 늘 얘기한다"며 "플레잉 코치 등 지도자 얘기는 서른 살 때부터 나온 것 같은데 관심도, 자신도 있지만 일단은 은퇴하고 나면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있다. 깊이 생각해보겠다"며 여지를 남겼다.
일단 눈앞의 경기에 집중하겠다는 김해란은 "시즌을 시작할 때마다 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는 시즌이 길고 힘드니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이번 시즌에는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모두 소중해졌다. 힘들었지만 선수들끼리 똘똘 뭉쳐서 좋은 경험을 한 시즌인 만큼 이번에 우승한다면 정말 기억에 많이 남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그렇다면 김해란은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질문을 받은 김해란은 지체 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는 "늘 하는 생각인데, 국가대표 리베로 하면 떠오르는 선수로 남고 싶다"며 "많은 리베로가 왔다 갔다 하며 기회를 받았기에 다들 국가대표 출신으로 불리긴 하지만 리베로 포지션을 언급할 때 딱 떠오르는 선수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요즘 세대교체를 하며 국가대표팀도 흔들리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랬던 만큼 힘든 시간을 겪어야 더 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도 배우고 견디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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