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교살자', 여성 서사 돋보이는 미국판 '살인의 추억'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 여성들이 피해자이고, 그 피해자들에게는 모두 마치 장식이라도 하듯 목에 리본이 매어져 있다.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추적하는 레코드 아메리칸 신문사 여성 기자들인 로레타 매클로플린(키이라 나이틀리)과 진 콜(캐리 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준비하면서 참고했다는 실화, 보스턴 교살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인지라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고도 불렸는데, 실제로 영화는 이 교살범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로레타의 치열한 추적과 열망을 담고 있다. 또한 연쇄 살인이 몰고 온 공포 속에서 사회가 범인을 밝히기보다는 이를 빠르게 무마하려는 시도 속에서 진실이 오히려 묻히는 그 과정 또한 <살인의 추억>을 닮았다.
하지만 <보스턴 교살자>가 <살인의 추억>과 차별되는 지점은 로레타와 진의 활약 속에서 돋보이는 여성 서사다. 형사도 또 범죄 보도를 하는 기자들도 응당 남자들이 하는 일로 여겼던 그 시대에, 새로 출시된 토스터기를 체험한 기사나 쓰던 로레타는 그 생활부를 벗어나 사건다운 사건을 기사에 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결국 기회를 갖게 되고 형사들도 또 기자들도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쉬쉬하며 별개로 치부되던 이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 보도한다. 세상은 발칵 뒤집어진다. 이 단독보도에 형사들이 반발하고 기자들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낸다.
여성들만 타깃으로 삼아 살해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연쇄살인이 아니라 단순한 개별적 사건으로 치부하며 자신이 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고 어려운지만 말하는 형사는 실상 범인 검거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여성들이 죽어나가고 그래서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두 여성이 대결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담담하게 기자들 앞에서 농담까지 해대는 형사들은 이로써 사회는 여전히 안전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만, 그건 그들의 무관심을 덮으려는 거짓말이다.
이 사건에 몰두하는 로레타는 집안에서도 세 아이의 엄마로써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물론 남편은 로레타가 일을 하는 것을 애써 도와주려 하지만, 그 역시 아내가 하는 일이 가정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쉽게 인정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다치고 오자 아이 돌보는 일을 도와주는 남편의 누나 캘리는 "로레타가 아이들을 망칠 것"이라고 말한다.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지만, 어째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많이 들릴 것 같은 그런 말이다.
<보스턴 교살자>는 계속해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로레타의 그 집요함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다. 거기에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픈 마음도 있지만, 로레타라는 여성이 당대의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한국의 관객들이라면 여성들만 타깃으로 벌어지는 이 범죄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여성 혐오 범죄'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게다. 그래서 그 문제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그 상황들 또한.
영화가 끝내 다다른 진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울림이 크다. 단순히 로레타의 활약으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는 어떻게 여성 혐오의 범죄들이 끊임없이 벌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경고와, 여성은 물론이고 아이들 가족들 모두 진정한 안전한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동차는 중요한 오브제로 쓰인다. 로레타가 범행현장을 찾아갈 때 그의 앞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위협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범인이 범행 대상을 따라가는 자동차 역시 그러한 공포감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남성들(형사, 기자)이 주로 차를 몰고 다니는 장면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마지막에 사건이 마무리된 후 비로소 로레타가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한 로레타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집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다가 차를 돌려 바로 간다. 거기 술을 마시고 있는 진과 합류한다.
이 장면은 로레타라는 여성의 이런 선택이야말로 사회의 안전을 향한 능동적인 행동이라는 걸 보여준다. 로레타가 아이들을 망칠 것이라고 말하던 그 사회에 대해 영화는 이 인상적인 엔딩으로 답을 준다. 세상의 더 많은 로레타들이 존재해야 비로소 사회는 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디즈니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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