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아시아 사람들은 아이를 더 안낳을까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3. 3. 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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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연합뉴스]
이 시대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거대한’ 문제를 고민하게 되지만 역시 압도적인 것은 저출산 문제가 아닐까 한다. 저출산 문제의 아이러니는 더 이상 출산율 제고에 기여하기 어려운 연배가 되어서야 이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십줄에 들어서 아들 한명 달랑 키워놓고 ‘아 참 큰일이다’ 탄식을 하고 있으니 자격도 자격이려니와 상황 개선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

지금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가장 낮은 권역은 동아시아, 소위 유교문화권이다. 세계은행 최신통계(2020년) 기준으로 한국이 0.8명으로 최하위, 바로 위로 홍콩(0.9명), 싱가포르·마카오(1.1명), 중국·일본·태국(1.3명)이 줄을 선다.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 합계출산율은 1.6명으로 전세계 평균 2.3명 보다 한참 낮다. 다른 권역에서 동아시아 저출산국만큼 출산율이 낮은 곳은 푸에르토리코, 말타 등 몇몇 소국을 제외하면 스페인·이탈리아(1.2명) 뿐이다.

왜 동아시아인들은 유독 아이를 낳지 않을까. 물론 저출산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거쳐간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다. 그에 대한 인구·경제학적 설명은 복잡하지 않다. 농경사회에서 아이는 대여섯살만 되어도 한몫의 노동력으로 구실을 한다. 자녀수가 곧 자산이 되는 농경사회는 아이를 많이 낳을 인센티브가 작동하는 사회다. 그에 비해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고도산업 사회의 아이는 ‘돈먹는 하마’ 같은 존재다. 최소 스무살까지는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키운 자식이 농경사회의 자식처럼 늙은 부모를 봉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대인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애완 동물을 기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직 기르는 기쁨이 있을 뿐이고 그 기쁨을 취하면 큰 기회비용이 따른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자녀양육은 경제적 인센티브로 뒷받침되지 않기에 그 기반이 취약하다. 한두 세대만에 인구구조가 무너져 내리는 현상이 그래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 설명일뿐 동아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급격한 출산율 저하를 보이는 ‘지역적’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에는 고도로 도시화·산업화된 지역이 많지만 북미나 서유럽의 도시화, 산업화가 그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보다 앞서 선진국이 된 국가들 중에선 비록 적정 수준보다 낮기는 해도 출산율을 그럭저럭 유지해 가는 나라들이 많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극단적인 저출산에는 동아시아만의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유교 문화와 산업화가 결합했을때 극단적 저출산 현상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일본 현대문학의 기원으로 통하는 나쓰메 소세키가 1914년 발표한 소설 ‘마음’을 읽으며 그 생각을 좀 더 굳히게 됐다.

소설 주인공 ‘나’는 동경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엘리트다. 졸업장을 들고 내려간 고향집에는 병으로 오늘내일 하는 아버지와 그를 간병하는 어머니가 있다. 어느날 대학 동기로부터 ‘중학교 교원 자리가 났는데 가지 않겠느냐’는 편지가 오고 아직 취업에는 관심이 없는 ‘나’는 거절 답장을 보낸다. 얘기를 들은 부모는 말한다. “그런데 가지 않아도 더 좋은 자리가 있겠지.” ‘나’는 부모의 터무니없는 기대감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취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나’에게 이런 말도 한다. “졸업한 이상 적어도 독립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우리도 곤란해. 남들이 댁의 차남은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하느냐고 묻는데 대답할 수 없어서야 나도 체면이 안 설 거 아니냐?”

주인공의 형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규슈에서 바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일본 농촌에서 두 아들을 모두 대학(이때 대학은 동경제국대학)에 보낸 것은 부모의 헌신적 뒷바라지를 의미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푸념처럼 말한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것도 한마디로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는 일이구나. 애써 공부를 시켜놓으면 그 자식은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이래서야 어이없게도 부모 자식을 따로 떼어놓으려고 공부시키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비단 소세키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또 일본이 아닌 한국이나 중국의 근대화 풍경에서도 이런 부모를 얼마든지 찾아낼수 있다. 자식이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는 것, 그가 출세하는 것은 부모의 현실적 복지와는 직접 관련성이 없다. 오히려 자식없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질 뿐이다. 그러나 부모는 아랑곳 않는다. 자식이 도회지에서 버젓이 한자리 차지하는 것, 그것을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나는 소세키의 소설에서 100여년전 ‘트로피 차일드(Trophy Child)’의 생생한 증거를 본다. 그것은 100년이 지난 지금 더 첨단화된 형태로 동아시아 저출산의 큰 이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산의 경제적 인센티브가 사라지면 적게 낳아서 근사하게 기르는 것이 목표가 된다. 심리적 만족이 주가 되는 양육, 그 결과가 트로피 차일드다. 구미 사회라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아시아는 특히 심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구미에선 초상류 사회에서나 이뤄지는 자녀 스펙관리 경쟁이 동아시아에선 중산층 수준에서 행해진다. 더 치열한 경쟁, 더 많은 비용, 더 많은 낙오자….

한국의 직장에선 매년 입시철이면 ‘누구의 자녀가 어느 대학을 갔다’는 소문이 반드시 돈다.내 주변에는 주변에서 질시할까 아들의 의대 입학을 몇년간 숨긴 선배도 있다. 자녀가 로펌에 입사하거나, 의사인 배우자를 만난 경우에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 그것이 자녀를 낳아 기르는 ‘보람’의 본질처럼 여겨지는 문화이므로 어떻게든 소문을 내지 않을수 없다. 양육과 관리에 들인 비용을 돌려받을 수도 없는데 뽐내기라도 해서 보상받아야 할거 아닌가.

이런 총력전적인, 정글 인류학적 차원의 양육 경쟁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고 한명만 낳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나마 한명도 십수년 전이었으니 가능했다. 만약 지금 시작한다면 나도 ‘참전 포기’를 선언할 것같다. 합계출산율 0.78명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출산 문제 해법은 딱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출산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출산이 ‘돈이 되면’(아름답지는 않지만 정확한 표현이다) 아이는 낳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방도가 마땅치 않다. 출산·양육지원금을 얼마나 왕창 쥐어줘야 할 것이며, 그 재원은 무엇으로 마련할 것인가. 저출산의 극단에 이르러 인간 자체가 희귀해지면 그때는 인센티브가 생겨날 것인가. 모를 일이다. 둘째는 전 국민을 교회에 보내는 방법이다. 체면 중시의 유교 문화가 ‘트로피 차일드’ 현상의 주범이라면 유교를 멀리하면 어떻겠는가. 가장 빠른 방법이 교회에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게 할 소리냐고? 물론 농담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문제에선 별로 답이 안 보인다. 그래서 농담 외에 별로 할 말이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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