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왜 미국과 러시아의 전장이 되었나 [독서일기]

장정일 2023. 3. 19. 0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심장지대〉
해퍼드 존 매킨더 지음
임정관·최용환 옮김
글항아리 펴냄
ⓒ이지영 그림

2월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깜짝 방문했다. 미군이 파견되어 있지 않은 전쟁 지역을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바이든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5억 달러(약 6485억원)의 군수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전쟁 발발 후, 미국의 우크라이나 원조 금액은 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새로운 군사 원조를 약속하면서 바이든은 젤렌스키에게 이렇게 말했을 듯하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이 저속하다면 이해영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사계절, 2023)에서 했던 단정을 다시 기억해도 좋다. “바이든의 결재 없이 젤렌스키가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을까?”

어떤 전쟁이든 미국에게는 선이다. 바이든이 우크라이나에 약속한 원조 대금의 많은 액수가 우크라이나로 건너가지 않고 미국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특별하지 않다. 미국은 1974년 이후 그 어떤 나라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군사보조금을 이스라엘에 지원했는데, 가브리엘 콜코는 〈제국의 몰락〉(비아북, 2009)에 이렇게 썼다. “이 군사 원조에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었다. 자금의 74퍼센트를 미국 내에 남겨두어 미국의 무기들을 구입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많은 지역에서 일자리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의회가 이스라엘 로비스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이해는 군수산업자의 배를 불려주고, 2024년 바이든의 재선에 필요한 표를 모으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삼인, 2000)이 다시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어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브레진스키는 이 책에서 제시한 호전적인 주장으로 어느덧 미국의 국제외교를 지도하는 ‘구루(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97년 4월에 집필을 끝낸 이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유라시아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geopolitical) 목표”라고 말한다. “미국의 세계 일등적 지위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러한 위치를 지속하느냐에 달려 있다. 유라시아는 일등적 지위를 향한 미국의 싸움이 계속되는 체스판이다.”

유라시아의 범주는 서쪽과 동쪽으로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이르며,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이하(아프리카)-튀르키예-인도가 제외될 뿐인 거대한 대륙이다. 하지만 미국이 패권국이 되기 위해 조정해야 하거나 제압해야 하는 지역은 구체적으로 현재의 러시아이며, 러시아를 제압·조정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반드시 분리해야 할 지역이 우크라이나다. 구루는 말한다.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 체스판 위에 새로이 형성된 공간으로서 지정학적 추축이라고 할 만하다. 독립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 유라시아의 제국이 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없이도 러시아가 제국의 지위를 노릴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아시아적인 제국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로서 생존하고자 한다면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보다는 중부 유럽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만일 중부 유럽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면 중부 유럽이 나토 및 유럽연합과 맺고 있는 연계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러시아가 이러한 연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러시아 또한 유럽의 일부가 된다는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러시아가 유럽을 거부하고 유라시아적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유럽의 적은 언제나 유라시아

러시아를 유럽화·서방화(미국화의 완곡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역사적 관성은 늘 유라시아에 안주하여 유럽화·서방화를 거부해왔는데, 브레진스키의 전략에 따르면 러시아를 유럽화·서방화하려면 우크라이나를 유럽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이것은 러시아의 뿔을 자르는 일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자장에 속해 있는 한, 배부른 러시아는 절대 유럽화·서방화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앞서, 푸틴이 조지아 침공을 결행하면서까지 서방에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추진한 이유가 여기 있다.

세계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에 기반한 러시아를 제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한 사람은 브레진스키가 인용하기도 했던 해퍼드 존 매킨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진 직후, 그의 대표 논문을 모은 〈심장지대〉(글항아리, 2022)가 출간되었다. 그는 1904년 영국 왕립지리학회 강연에서 유라시아 지역을 ‘심장지대(Heartland)’라고 명명하면서, 해상세력(영국·미국)과 유럽이 이 지역을 관리할 것임을 암시한다. 매킨더는 그 이유를 역사에서 찾았다. “유럽 문명이라 칭하는 것은 아시아 민족의 침입에 대한 결과, 다시 말해 극히 평범한 의미로서의 전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적은 언제나 유라시아였다는 것이다.

매킨더의 지정학은 미국에 씨앗을 뿌리며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에 의해 설계되고 유도된 것이다. 이것이 전쟁을 이해하는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러시아의 꿈인 유라시아주의에 있다. 참고할 책으로는 기왕에 번역되어 있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여러 논문집과 제임스 빌링턴의 〈러시아 정체성〉(그린비, 2018), 월터 라쿼의 〈푸티니즘〉(바다출판사, 2017)이 있다.

유라시아주의는 반(反)서구를 표방했던 이전의 슬라브주의와 유사하지만, 러시아의 보수주의·우파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이념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낸 대응 이념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난 망명객들이 만든 유라시아주의(제1기)는 소비에트(소련)가 해체되면서 나라가 망했다는 울분을 키운 러시아인, 공산주의를 대신할 이념을 찾는 러시아 좌파, 서구의 러시아 공포증(Russophobia)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적과 싸우다 적을 닮는다고 했던가. 새로 부활한 유라시아주의(제2기)는 러시아인들이 자본주의·군국주의 이론이라고 비판했던 지정학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니까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지정학 전략과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라는 넛크래커(호두까기 기계) 속에 든 호두였다. 이런 판에서는 지도자의 역량이 더욱더 중해진다. 젤렌스키에게는 그런 응력이 없었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