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자 쇄담] 일본 야구대표팀이 후추를 가는 이유

박강현 기자 입력 2023. 3. 18. 14:56 수정 2023. 3. 18.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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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준결승 선착한 日
승승장구 행보 뒤엔
팀 하나로 묶는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

[쇄담(瑣談) : 자질구레한 이야기]

일본 야구대표팀의 ‘투타(投打) 겸업’ 수퍼스타 오타니 쇼헤이(29·LA에인절스)까지 후추를 갈기 시작했다.

일본 야구대표팀의 오타니 쇼헤이가 지난 10일 WBC B조 조별리그 한국전에서 2루타를 친 뒤 두 주먹을 맞대고 후추를 가는 듯한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를 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은 지난 16일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8강에서 이탈리아를 9대3으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일본은 2006년부터 열린 초대 WBC를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매 대회에서 최소 4강안에 드는 등 ‘야구 강국’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통산 3번째 우승을 겨냥한다.

뜨거운 기세를 보이는 일본 대표팀의 중심엔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가 있다.

◇일본계 미국인 눗바가 전파한 ‘후추 그라인더’

라스 눗바(26·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일본 출신 이민자 에노키다 구미씨와 미국인 아버지 찰리 눗바씨의 아들이다. 일본계 미국인이지만, 부모 중 한 명의 출생지에 따라 출전국을 결정할 수 있다는 WBC 규정 덕분에 일본 유니폼을 입었다. 2006년 초대 WBC 이래 일본 국적이 아닌 선수가 일본 야구대표팀에 승선한 건 처음이다.

일본 야구대표팀의 라스 눗바가 지난 11일 WBC B조 조별리그 체코전에서 안타를 치고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를 하는 모습. 그는 일본 대표팀에 이 세리머니를 전파했다. /AP연합뉴스

건장한 체격(190cm·95kg)을 자랑하는 눗바는 이번 대회에서 일본이 치른 5경기에 모두 출전해 타율 0.368(19타수 7안타) 3타점 2도루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면서 안타를 치고 출루하거나 타점을 올릴 때마다 두 주먹을 위 아래로 맞대고 뭔가를 가는 듯한 이른바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눗바는 일본어로는 소통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그는 팀에 녹아들고 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가 MLB(미 프로야구)에서 뛰며 터득한 독특한 세리머니를 전파했다. 일본 선수들도 일본계 미국인인 눗바를 환영하는 의미로 이 세리머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는 어느덧 일본 대표팀의 상징이 됐다.

두 주먹으로 후추를 쥐어짜고 가는(grind) 듯한 동작이 반복되는 이 세리머니는 원래 눗바의 소속팀인 카디널스 선수들이 점수를 내거나 홈런을 쳤을 때 하는 행동이다.

지난 시즌부터 카디널스에서 “우리 실력을 갈아 넣어 이기자” “끈기 있게 하자” “꾸준히 하자” 등의 의미로 경기장 안팎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팀 단합을 꾀하기 위해 이 세리머니가 시작됐다고 한다. 영어 ‘grind’란 단어엔 ‘무엇을 간다’는 뜻 말고도 ‘꾸준히 하다(to work laboriously)’와 같은 의미도 담겨 있다. 소속팀에서 수없이 후추를 간 눗바가 이걸 일본 대표팀에도 퍼뜨린 것이다.

◇후추로 하나된 日...오타니도 후추를 간다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는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강한 전염성을 갖고 퍼져나갔다.

다른 선수들은 물론이고 현대 야구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투타 겸업을 소화하며 2021 MLB시즌에 만장일치로 아메리칸리그(AL) MVP를 받은 오타니까지도 후추를 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타니는 지난 6일 NPB(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와의 연습 경기 때 연타석 3점 홈런을 친 뒤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를 하면서 관심을 받았다. 그러더니 WBC B조 조별리그 한국전 등에서도 안타를 치고 이 세리머니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시민들이 지난 16일 열린 WBC 8강전(일본 vs. 이탈리아)을 보면서 함께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오타니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일본팬들은 열광하고 있다. 눗바는 “최근 후추 그라인더 구매가 (일본에서)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뿌듯해 했다.

실제로 일본이 8강전까지 치른 도쿄돔 관중석에선 일본 선수들이 출루를 할 때마다 함께 후추를 가는 팬들이 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각종 술집에서도 후추가 많이 갈린다고 한다. MLB 카디널스 팬들 사이에선 아예 “눗바가 오타니에게 후추 가는 법을 알려주더니 오타니 역시 후추를 갈기 시작했다. 그가 곧 우리 팀에 올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돌고 있다.

후추 그라인더 세리머니에 힘입은 것일까. 오타니는 조별리그 B조 MVP(최우수선수)로 뽑혔고 이탈리아와 벌인 8강전에서도 선발 등판해 호투하며 일본을 4강으로 이끌었다.

일본은 이제 후추 그라인더를 들고 미국으로 향한다. 준결승과 결승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는 21일 멕시코와 결승행 티켓을 놓고 맞붙는다. 얼마나 많은 후추가 또 갈릴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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