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3대 개혁이 성공하려면 [열국지로 보는 사람경영]

장박원 기자(jangbak@mk.co.kr) 2023. 3. 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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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로 보는 사람경영129]윤석열 대통령은 노동·연금·교육 등 3대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노동개혁은 근로시간 유연화와 노동시장 이중구조 타파가 핵심입니다. 연금 개혁은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국민 노후를 보장하는 연속성 확보가 관건입니다. 교육개혁은 백년대계를 위한 인재 육성에 성패가 달렸습니다.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제입니다. 개혁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현행 체제를 바꾸는 일입니다. 발상의 전환과 과감한 결단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단행한 개혁과 리더십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영화 ‘영웅’ 속 진시황의 모슴
진시황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천하통일을 꿈꾸었던 것도 이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시황은 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직후 이런 교서를 내립니다. “천하가 크게 안정됐으니 이제 왕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동안 이루어놓은 공업(功業)을 드러낼 수 없고 후세에 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료들은 왕의 호칭을 논의하도록 하라.”진시황이 임금의 호칭을 새로 정하라고 한 것은 시대가 질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실권자였던 이사는 고심 끝에 왕의 호칭을 ‘태왕(泰皇)’이라고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진시황은 ‘태’자를 빼고 ‘제(帝)’를 붙여 ‘황제’라는 명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최초의 황제라는 뜻으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세, 삼세, 사세 황제로 불러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천하통일 후 진나라의 거의 모든 제도를 만들었던 이사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과감한 발상이었습니다.

호칭 문제를 해결한 뒤 진시황은 본격적인 제도 개혁에 나섰습니다. 전체 뼈대를 세우고 세부 사안까지 챙긴 사람은 이사였지만 최종 결정은 진시황이 내렸습니다. 가장 논쟁이 컸던 개혁은 갑자기 커진 영토를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느냐 하는 체제 문제였습니다. 황제 혈족을 각 지역의 왕으로 보내 대리 통치하는 기존 봉건제와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황제가 직할하는 군현제를 놓고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시황은 확실한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최고위직에 있었던 승상 왕관과 형벌을 관장하는 정위 이사의 의견이 각각 봉건제와 군현제로 완전히 갈렸습니다. 논쟁을 지켜보던 진시황은 과감하게 이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판에 단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봉건제를 실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군현제가 비현실적이고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일단 제도가 자리를 잡는다면 가장 확실하게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입니다. 통일 후 혼란을 신속하게 수습하는 측면에서도 봉건제에 비해 군현제는 장점이 많았습니다. 진시황 이후 펼쳐진 중국 역사를 보면 군현제가 통치체제의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진시황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지도자의 안목과 결단이 개혁에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진시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추진된 다른 개혁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중국 역사의 기반이 된 거대한 주춧돌은 진시황과 이사의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군현제 도입을 시작으로 신속한 정보 전달과 군대의 빠른 이동을 위한 대대적인 도로 정비와 백성의 생업을 개선하기 위한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등 많은 혁신 조치들이 전방위적으로 시행됩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추진해도 달성하기 힘든 개혁을 진시황은 당대에 달성했습니다. 그의 추진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은 명령을 내리고 그대로 앉아 있는 스타일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개혁의 성과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천하를 통일한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부터 3년 간 해마다 주요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이를 순무라고 합니다. 30대 후반에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10년도 되지 않아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시스템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저력은 확고한 비전과 신념에서 나왔습니다. 왕의 호칭을 황제로 바꾸고 군현제를 통해 권력을 중앙으로 모았으며 각종 제도 개혁과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로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습니다.

이를 위해 진시황은 매일 엄청나게 많은 문서를 보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렸습니다. 7개 제후국을 하나로 모았을 뿐 아니라 홀로 모든 결단을 내렸으니 그가 감당해야 할 업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과로에 지친 진시황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럴수록 생명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졌습니다. 제국의 완성을 위해서는 오래 사는 수준을 넘어 죽지 않아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영원한 삶을 강구한 그의 과욕은 영생을 미끼로 황제에게 접근한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빠지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사기꾼들이 올린 불노초는 사실 독성이 강한 유해 식품이었습니다. 영생불멸을 추구했던 열망이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진시황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진나라은 곧바로 멸망했고 개혁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전체를 관할하는 통일 국가의 기본 시스템은 전적으로 진시황과 이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상의 전환과 강력한 추진력은 개혁의 필요조건입니다. 여기에 개혁의 성과가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국론을 통일할 수 있다면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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