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거리서 만나는 미술 언어… 일상 풍경이 빛나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2023. 3. 1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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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하고도 반쯤 투명한, 권순우의 전시들
독립큐레이터 활동으로 유연한 짜임새 갖춰
작가와 협업 제안… 적극적 프로젝트 확장
삼성역 인근 ‘K팝 스퀘어’ 전광판 활용
작가의 작업 이미지 불특정 시민에 상영하고
백화점 공간에선 미디어 아트 선보이고
일상에 들어온 미술 언어 관객들 호응
미술관 밖으로 나온 전시… 어디든 의미 있어

전시가 하나의 그릇이라면 어떤 재료로 빚어야 할까.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의 작품을 담아내기 위해서라면 매우 유연하고도 반쯤 투명해야 좋겠다.

다양한 전시기획자가 미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술관 및 박물관, 갤러리 등의 기관에 소속된 큐레이터가 있는가 하면 기관 바깥에서 독립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권순우(37)는 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독립 큐레이터이자 전시공간 ‘취미가(趣味家·Tastehouse)’의 디렉터다. ‘취미가’는 청년 세대 미술인들이 운영해온 자생적 전시공간(신생 공간)이다.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을 공부했고, 지난 10여년간 동시대 청년 작가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하며 전시를 꾸준히 선보였다. 대부분의 기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적인 활동을 지속해왔다.
‘OoH’(2021) 삼성역 K팝 스퀘어 미디어파사드 전시 전경. 권순우(취미가)와 워크스 공동 기획. 취미가 제공
◆독립큐레이터 권순우―들판에서 전시를 만드는 일

“제가 체감하는 기관 밖의 상황은 들판이에요. 비가 오면 비를 그대로 맞아야 하고, 바람이 항상 불고….”

권순우는 자신이 일하는 현장이 들판 같다고 했다. 조직적 체계 아래 업무를 수행하는 미술 기관 큐레이터와 달리 매번 다른 조건 아래서 전시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기획에 착수하면 규모에 따른 예산을 확보하고 분야별 전문 인력을 섭외해 팀을 구성한다. 기획과 예산 운용, 각종 섭외, 텍스트 생산과 인쇄물 편집, 설치와 철수 전반에 폭넓게 관여하며 팀을 이끈다. 때마다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도 따르지만 전시 특성에 맞추어 팀을 구성하니 업무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같은 세대 미술인들과 교류하는 과정 속에서 기획의 단서를 발견하기도 한다. 일련의 활동이 가시화해 대기업이나 공기관에서 먼저 프로젝트를 제안해오는 사례도 종종 있다.

권순우의 전시는 유연한 짜임새를 갖고 있다. 견고하면서도 느슨한 관계가 한데 모여 전시라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지난해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초청되어 본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인 정금형(43) 작가와의 프로젝트도 우연처럼 시작됐다. 2017년 어느 날 정금형이 트위터에 ‘다음 주에 무언가를 팔 예정’이라는 글을 올렸다. 지난 포스터의 재고를 소진하려는 의도였다. 글을 본 권순우가 작가에게 연락해 취미가와의 협업을 제안했고, 보다 적극적인 프로젝트로 확장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수일 만에 개막한 ‘정금형의 배달 서비스’(2017∼2020)는 관객 20인에게 작가가 직접 포스터를 배달해 주는 행사로 마련됐다. 포스터는 금방 소진됐고, 관객의 반응도 좋아 같은 해 동명의 프로젝트를 한 번 더 선보일 수 있었다. 2020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교육과에서 연락이 왔다. 대면 교육이 어려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정금형의 배달 서비스’를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서 재구성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 시작된 협업이 그렇게 3부작 프로젝트로 확장됐다.
‘정금형의 배달 서비스’(2020) 홍보용 포스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및 권순우(취미가)가 기획하고, 신신(신해옥·신동혁)이 디자인했다.
◆일상의 풍경 가운데 빛나는 미술

권순우가 작년 및 재작년에 진행한 두 가지 프로젝트는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장소 속에 미술의 언어를 끼워 넣은 시도였다. 현실의 맥락 한가운데 효과적으로 침투하기 위해 선택한 매체는 미디어파사드 형식의 대형 스크린이다. 미디어파사드란 건물 벽면에 영상을 투사하여 디스플레이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2021년 서울 삼성역 인근 ‘K팝 스퀘어 미디어파사드’ 전광판에 워크스(Works)의 작업 이미지가 크게 상영됐다. 시각디자인 그룹 워크스와 권순우가 공동 기획한 프로젝트 ‘OoH’(2022)다. 워크스와 함께 구상하고 있던 단계에서 마침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0’ 팀의 지원이 더해져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 전광판 크기와 상영 가능 시간에 맞추어 최적의 이미지를 준비하자 세로 20m, 가로 272.7m의 결과물이 나왔다. 이처럼 거대한 이미지를 불특정 다수 시민에게 선보이는 경험이 작가와 기획자에게도 새로웠다. 현실 공간 속 전광판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외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져 나간 사진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향유하는 관객이 많았다.
‘빛나는’(2022) 롯데백화점 동탄점 전시 전경. 권순우(취미가) 기획, 사진은 노상호의 작품.
이듬해인 2022년에 연 전시 ‘빛나는(Shining)’(2022)은 롯데백화점 동탄점에서 진행됐다. 노상호, 식물상점×도시(DOSI), 워크스가 작가로 참여했다. 백화점 내 상점 안팎 공간에 거대 디지털 스크린을 설치하여 미디어 아트를 선보였다. 상업 공간인 백화점과 미술 전시의 성격을 분리해 생각하기보다는 서로 간 공통분모를 강조하여 어우러지도록 하고자 했다. 이에 상업 광고의 시각 언어를 활용하여 작업하는 미술 작가를 섭외했다. 백화점 내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을 활용하여 대형 이미지를 상영해 보기로 합의했다. 백화점 방문객의 호응은 기대보다도 컸다. 특히 어린이 관객들이 기뻐했다.

일상의 풍경을 비집고 들어온 이상하고 아름다운 미술의 언어들…. 최근 미술을 향유하는 관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아침 일찍 늘어선 입장 대기 줄을 목격하는 일도 익숙해졌다. 그들이 미술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심 거리와 백화점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다시금 좋은 미술을 목격하도록 돕는 일은 권순우 같은 기획자들의 역량이다. 더 많은 사람이 평범한 매일 속에서 오늘의 미술을 만나도록 고무하는 일.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분명 전시는 미술관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것이 들판이든, 서울 시내 한복판이든, 백화점이든 모두 의미 있다.

◆오늘의 들판을 확장하기

돌이켜보면 시작이 들판 위였다. 권순우가 기획에 참여한 첫 전시는 2014년 김동희(37) 작가의 개인전 ‘나열된 계층의 집’이다. 홍대 인근 유휴 공간을 여럿 찾아내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기획이었다. 전시는 잊힌 장소의 생명을 한시적으로 일깨우고 활성화한 예술적 시도로서 주목받았다. 지금은 경의선 숲길이 조성되어 주말마다 인파가 몰리는 연남동 부지가 그때는 온통 흙길이었다. 갈대 풀숲 사이를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개미 떼처럼 걷다 보니 큰 공연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전시라는 사건에 의해 변모한 장소만큼이나 그것을 목격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 보낸 시간이 인상 깊었다. 여행 같은 여정이었고, 모험 같은 들판이었다.

권순우는 이후 김동희와 ‘오페라코스트’, ‘웨스트웨어하우스’, ‘아시바비전’ 등의 미술 플랫폼을 공동 운영했다. 돈선필(39) 외 다수의 동료와 함께 ‘굿-즈’(2015)를 기획해 선보이면서 2010년대 ‘신생 공간’의 활동을 가시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6년부터 돈선필, 김동희, 박현정(37) 등과 함께 마포구 성산동 소재의 ‘취미가’를 운영했다. 수년간 임대했던 공간은 현재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취미가’의 이름으로 기획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2016)을 기획해 웨스트웨어하우스에서 선보였고, ‘취미가’에서 곽이브 개인전 ‘역할’(2017), 강동주 개인전 ‘창문에서’(2018), 송민정 개인전 ‘COLD MOOD (1000% soft point)’(2018) 등을 선보였다. 2017∼2018년, 2020년에 ‘취미가’에서 개최한 ‘취미관(趣味官·TasteView)’ 또한 낯선 형식의 전시다. 피규어 수집가나 그릇 애호가들이 구입할 만한 투명한 유리 진열장을 공간 가득 세워 두고 그 안에 동시대 작가들의 소품 및 굿즈를 가득 채워 넣었다. 각각의 작품 옆에 가격이 잘 보이도록 진열한 것이 특별했다.
‘숏서킷’(2021) 전시 전경. 권순우(취미가)가 기획했다.
2021년 ‘취미가’에서 선보인 ‘숏서킷’이라는 전시 서문에 그가 다음처럼 썼다. “2010년대 한국, 특히 서울에서 경험하는 미술의 사이클은 너무 빠르게 반복되고 있다. … 그렇게 생겨나는 수많은 짧은 서킷들에 각자의 몸을 싣고 달리기를 반복한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2023년 3월. 이제는 변해버린 경의선 숲길에서 그때의 갈대 풀숲을 종종 떠올린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들판이 있다. 사람들의 눈 속에도 책장의 책 뒤에도 들판 같은 어려움이 저마다 있다. 그것이 칼바람 부는 폐허이든 척박한 돌무덤이든 한 번 목격했다면 선택해야 한다. 피해 갈 것인지 나아갈 것인지, 또는 가꾸어 내 것으로 만들 것인지. 적어도 권순우가 자신의 들판에다 만든 전시 덕분에 나는 보물찾기 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흙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달리지 않아도 좋았다.

박미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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