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완벽한 백인 딸'로 살아야 했습니다"
[헬레나 나은 카이롤]
나는 최근에 고향인 부산 해운대에서 한국인이면서 프랑스인인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식 전통 혼례를 치른 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서 남편의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었고 나는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처음 만났으며 각각의 출생가족들과 재회했습니다. 꿈같은 현실이었지만 이 동화 같은 스토리 이전에 내 인생은 눈물과 슬픔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친생부모님은 6.25 전쟁 통에 자라셨고 나는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수천명의 입양아동들이 해외로 보내졌고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이 광란의 입양 시기에, 나는 공식 입양 서류에 고아로 기록됐습니다. 한국 정부 관리들은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명목 하에 이 문서들이 법적으로 진실하고 정확하다고 서명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이상하고 특이한 삶입니다. 나 또한 30년 동안 이 삶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고아로 둔갑시키기 전에도, 나는 한 인간으로 존재했습니다. 입양인들은 마땅히 입양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승리의 삶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
완벽한 가족:
나는 네 살 때 아름다운 집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것이 엄청난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우 이상하게도, 나는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입양한 사람들을 부모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입양 기억상실증'이 있었기에 진실을 몰랐고, 겉보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런 인위적인 현실 속에서 나는 백인 딸을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내가 살던 그 멋진 집에는 손님을 위한 붉은 색 방이 있었고, 녹색 방에는 돌로 된 벽난로가 있었습니다. 내 침실에는 두 개의 침대와 태양열 전지판이 놓여있었습니다. 식당에서는 근사한 정원이 보였습니다. 나는 예쁜 옷을 입고 최고의 학교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실수를 하거나 감정을 가진 인간이 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완벽한 아이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엄마는 엄청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나는 그 멋진 집에서 미소 짓는 부모님과 함께 잔인했던 어린 시절을 간신히 살아냈습니다.
18년 후:
지구 저편에서, 나를 입양 보낸 입양 기관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나의 친생형제들이 나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평생 동안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나는 감히 이뤄지리라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게 프랑스로 입양된 남동생과 한국에 남아있는 여동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남동생과 나는 각각 다른 나라의 가족들에게 보내진 분리된 남매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나는 24시간 동안 일시적인 실어증을 보였습니다. "당신의 출생가족들이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라는 말을 듣고 내 마음은 얼어붙었습니다. 문득 내 존재 전부가 가짜처럼 느껴졌습니다.
KBS에서 추석 다큐멘터리를 찍자며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은 촬영을 위해 3개월 후 미국으로 날아왔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완벽한 가족으로 보이기 위해 맡은 역할을 다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입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쇼. 미국에서 촬영을 마치고 나서 KBS 스태프들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국에서 나의 친생가족을 만나고, DNA도 검사를 받고, 막내 여동생을 찾기 위해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습니다.
나는 군중 속에서 순식간에 나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찾아내어 서둘러 다가갔고 카메라맨은 그런 나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나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서로의 팔을 단단히 얽었던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온갖 감정에 휩싸였던 그 순간,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나라에 서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나의 삶이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의 풍광은 사뭇 다르게 보였습니다. 나는 산에서 피어오르는 운무를 보았고, 우아한 분홍색 나뭇잎들이 사찰의 입구에서 살랑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자연에는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배어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내가 태어난 곳이구나. 애써 한국을 부인했던 나 자신에 대해 놀라움과 후회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이정빈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시아인들을 위한 특수한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를 실시했고, 결과는 99.9%로 일치하였습니다. 나는 이 낯선 사람들이 나의 혈육이라는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나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한 피붙이입니다. 이런 시간들을 겪은 후,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나의 가족은 명동에 있는 한복 가게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한복과 고운 원단들을 보고 황홀했습니다. 한복을 입고 나니 불현듯 내가 진짜 한국인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복은 나의 가족이 준 특별한 선물이었지만, 나는 공주처럼 환대받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망설이면서 거울 속의 나를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출생가족의 품에서 한국인으로 자랐더라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80세가 되신 나의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 할머니는 곧바로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어렸을 때랑 똑같구나. 눈이 크고 예쁜 얼굴에 아빠를 쏙 빼닮았어. 순하고 사랑스러웠지." 할머니의 정신은 또렷했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나를 선명하게 기억했습니다. 비로소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알던 가족들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할머니는 번역기로 "어린 것이 얼마나 서러웠어. 참말로 마음이 아프구나. 우리는 너를 절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단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나의 잃어버린 영혼의 한 조각을 되찾았습니다. 존재하는 지조차 몰랐던 사랑을 뜻하지 않게 찾게 된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 마치 마법처럼 입양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사랑은 그들이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족의 사랑은 우주를 감동시켰고, 나를 나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 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 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헬레나 나은 카이롤]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尹대통령, 한일 경제인 만나 "미래기금 조성 감사"
- "尹 대통령 '日 수출규제 해제' 주장, 사실과 다르다"
- 미 대형은행들의 퍼스트리퍼블릭 39조원 지원에도 불씨 '여전'
- 尹정부 '69시간제' 오락가락에 여당도 '부글부글'…"조삼모사"
- 현실판 '글로리'? 전문의 90% "복수 꿈꾼 피해자 진료"
- 의원정수 늘려 비례대표 '+50석'? 중대선거구제 개편?
- '고독한 세일즈맨' 尹 상상 속 '그랜드 바겐 세일', 현실은?
- 경찰, 기자회견 끝낸 박경석 전장연 대표 체포
- '친윤' 대 '친명', 적대적 공생 혹은 정치의 몰락
- 폴란드 "우크라에 수일 내 전투기 4대 지원"…미국은 선 긋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