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죙일 놀기만 헌 늠이 됩대 큰소릴 치너먼"...'예산말 사전' 연구 이명재 시인

김재근 선임기자 2023. 3. 1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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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논밭에서 건져올린 눈부신 언어들
이명재 시인은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16년 동안 2만 5,000여 개의 낱말(사투리)을 발굴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사진 김재근 기자


"개 콕구녕같은 소리 허구 자빠졌네."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있네.)

"죙일 놀기만 헌 늠이 됩대 큰소릴 치너먼."
(종일 놀기만 한 놈이 도리어 큰소릴 치너먼)

이명재 시인이 고향에서 건저 올린 언어들이다. 이 시인은 2008년부터 예산과 그 주변의 낱말과 문장을 다듬고 정리하고 있다. 16년째 매일매일 동네 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모으고 기록한다. 생업인 논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을 빼고는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게 일과이다. 하루에 최소 5시간, 토~일요일에는 13~15시간씩 이 일에 매달린다.

"시간이 아까워 하루에 한 끼씩 먹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약을 먹으라고 한다. 식후에 약을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은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두끼씩 먹는다."

등산이나 모임, 동창회 참석도 자제한다. 경조사도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봉투만 보낸다고 한다. 이렇게 부지런하게 해야 1년에 200자 원고지 3,000매 정도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명재 시인이 펴낸 예산말 사전과 산문집.

◇고향에 의미 있는 일하려 연구 시작

그는 '언어 연구가' '언어학자' 이전에 실력 있는 시인이다.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2011년 문학마당 신인상을 수상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어엿한 등단 절차를 두 번이나 거친 문인인 것이다.

이 시인의 언어 연구 출발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개인사와 닿아있다. 1997년 12월 그가 운영하던 학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던 것이다.

"잊혀지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12월 21일 밤에 불이 났다. 그 뒤로 10년 넘게 너무 힘든 시간이 계속됐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먹고 살랴, 빚을 갚으랴 시도 문학도 거의 잊고 지냈다고 한다.

"어느 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시를 쓰고 문예운동을 하려고 고향에 자리 잡았는데 돈을 번 것도 아니고, 시를 써온 것도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2009년부터 예산의 말과 사투리 연구를 시작했다. 고향 사람들과 후배들에게 뭔가 힘이 되고 의미가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일하면서 의욕도 생겨났다.

"친구나 친지, 동네 어르신과 대화할 때마다 주의를 기울여 듣고 메모를 한다. 요즘은 핸드폰을 활용하여 그때그때 새로운 것들을 기록한다."

이 시인은 예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다. 대학교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어떤 문장이나 낱말도 잘 알아 듣는다. 예산, 홍성, 청양, 서산, 태안 등 차령산맥 북서쪽 내포권은 충청도 사투리가 꽤 심한 곳이다. 타지 사람들은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5~7년 정도 일하면 마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일거리가 너무 많았다. 정부가 표준말 정리와 보급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방의 사투리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상태였다."

첫해 3,000여 개의 낱말을 정리했고, 그 다음해 1년을 더해보니 5,000여 개로 늘어났다. 그 뒤로 한해 두해, 낱말을 모으고 정리하여 데이터를 구축했다. 이렇게 해서 2011년부터 2019년까지 4권의 충청남도 예산말 사전을 펴냈다. 이들 책에는 매권마다 대략 4,000개의 낱말이 실려있다. '가찹다(가깝다)' '땀꾸녁(땀구멍)' '신갱이(도토리)' '커리(켤레)' 같은 예산의 토속어와 사투리가 담겨 있다.

이 시인이 펴낸 사전은 용례를 매우 충실하고 풍부하게 담았다. 단어마다 예산의 실생활에서 쓰이는 구어체 문장을 찾아내 수록하였다.

"사투리에는 그 지방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온 나라가 표준어 하나만 쓰면 얼마나 획일적이고 삭막하겠는가?"

충청도 어법은 상황을 거두절미하고 절제와 함축미를 보여주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직설적인 표현은 거의 없고 한자락 돌려서 에둘러 표현한다. 상대방을 공격하기보다는 배려하고 보듬고 공감해준다는 것이다.

이명재 시인이 자신의 저서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재근 기자

◇배려하고 에둘러 표현하는 충청도 어법

"식당에 가서 밥이 늦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밥이 안나오면 '밥 새로 하는겨?'라고 묻고, 더 기다리다가 그래도 밥상이 안보이면 '논 매러 갔슈?'하고 재촉한다. 그러면 식당주인이 '논은 벌써 맸구… '라고 대꾸하며 능청스럽게 밥을 내온다."

수도권이나 영호남 사람이 들으면 답답하고 속 터지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등 좋은 점도 많다는 것이다.

이 시인이 지금까지 정리한 예산말은 2만 5,000여 개에 이른다. 전국적으로 한 지역, 그것도 시·도가 아닌 군(郡) 단위 지역의 낱말을 이처럼 많이 모으고 정리한 사례는 없다. 더구나 이명재 시인 혼자서 한 일이다. 구도자처럼 오랜 세월 한 가지 일에 묵묵히 몰두해온 덕분이다.

그는 예산말 사전 외에도 '속 터지는 충청말' 2권과 '충청도말 이야기' '사투리로 읽어보는 충청문화'(공저)라는 산문집도 펴냈다. 시골말과 사투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는 저작들이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교육부장관과 충남도지사, 교육감 표창을 받았고, 2021년에는 한글학회 국어운동 표창을 받았다.

"충남 태안 서산에서 '워디'로 시작된 말이 예산과 아산 천안, 평택 안양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디' '오디'로 변해갑니다. 부추의 고유어인 '졸'은 경기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영호남에 이르며 '솔' '솔풀' '소풀'로 다양해집니다. 세종이나 옥천, 금산 등에서는 '정구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요즘 예산 주변의 홍성, 청양, 서산, 태안의 언어 연구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언어라는 게 한곳에 홀로 떨어져 유아독존하는 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근대적 교육과 정보통신, 교통의 발달로 급속하게 사라져가는 고유어와 사투리를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전하겠다는 것이다.

"지링이 용꿈 꾸고 용틀임 혀봐야 질바닥이 올러와 말러 죽기배끼 더 허겄냐? 개천이 미꾸락지 잉어 되겄다구 용써 봤자 논둑에 구녕이나 뚫어놓넌 웅어배끼 더 되겄냐? 송칭이는 솔잎사굴 뜯넌 거구 눼는 뽕잎사굴 먹으매 사넌 겨. 농사배끼 물르던 눔이 지 분술 물르구 농사처 집어던지구 도회지 가 봤자 도회지 시궁창에 지링이 노릇배끼 뭇허넝 겨, 이눔아!"

이명재 시인이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글이다. 질박하고 진득한 낱말들이 살아 숨쉰다.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온 농부의 진솔하고 끈끈한 삶이 담겨있다. 농투산이와 그 농사꾼이 갈아먹는 투박한 땅 냄새가 난다. 말과 언어가 바로 이 시인 자신인 것이다. 눈부시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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