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차 정부의 100년 역사 청산…‘용기’인가 ‘객기’인가

김찬호 기자 2023. 3. 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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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방식’ 결정
‘소득’은 과거로 되돌린 한일 관계뿐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보도진 질의를 듣고 있다. / 도쿄=연합뉴스

[주간경향]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하게 국가 간 갈등이 발생한다. 첨예하게 갈린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은 주로 ‘협상’이다. 이를 ‘외교’라고 부른다. 국가 간 협상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50 대 50. 사안에 따라 55 대 45로 조금 더 양보하기도 한다. 정상국가라면 절반을 훌쩍 뛰어넘어 양보하는, 혹은 양보한 것처럼 보이는 협상은 하지 않는다. 국내 정치적 반발까지 감수하며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국가적 비상사태, 임박한 전쟁 수준의 위기, 별도의 정치적 목표 그리고 정치 책임자의 판단 착오가 있지 않다면 말이다.

‘제3자 변제방식’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의 해법으로 낙점한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도 이 구조로 살펴볼 수 있다. “양국 관계 정상화는 두 나라 공통 이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매우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윤 대통령의 말 속에 정부가 얻고자 한 것이 드러난다. 이해를 어렵게 하는 명분, 각종 수사 등을 걷어내면 ‘역사문제’와 ‘미래이익’의 교환이다. 협상에 오른 품목들만 놓고 보면, 1965년 한일협정 때와 닮았다. 강제동원 배상금을 이번에는 한국이 지급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윤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3자 변제방식은) 나중에 구상권 행사로 이어지지 않을 만한 해결책”이라며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한국 방안을 미심쩍어하는 일본에 대한 배려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윤석열 정부’에선 그런 일(구상권 청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설명이 해당 발언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대신 앞으로 한국 정부는 윤석열 정부 입장을 계승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마치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의 인정 및 사죄를 담은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느냐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닮았다. 정권 교체 시 제3자 변제방식은 오히려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본인 발언대로 ‘정치지도자의 책무’를 쫓아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한 것이 아닌 한일 간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뇌관만 심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완전히 패배한 외교였나

‘통 큰 양보’가 사실상 불가능한 외교에서 ‘완전한 승리가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전제가 해당 논리를 뒷받침한다. 이는 주권 국가 간 외교는 ‘순차게임’이 아닌 ‘동시게임’이라는 점이다. 상대가 한 수를 두면 이를 다 지켜보고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주고받을 것을 맞춰보고 교환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한쪽이 완전히 유리한 결과 도출은 어려워진다. 간혹 외교에서 순차게임 상황이 발생하기는 한다. 천재지변 등으로 발생한 재난상황에 대한 ‘긴급 지원’이거나 정치·경제적 종속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상황이다.

‘제3자 변제방식’이 국내에서 논란이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한일 간 외교가 마치 순차게임처럼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는 가해국과 피해국이 명확한 사안이다. 그들 표현대로 ‘만세일계’(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라는 천황이 존재하는 한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일본 스스로 짊어진 ‘원죄’를 피해자가 속한 한국이 해결해주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는 방식, 시기, 관례 등에 비춰봐도 모두 논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확대정상회담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왜 제3자 변제방식이어야 하느냐’, ‘왜 꼭 지금이어야 하느냐’ 등의 문제는 정치적 판단에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왜 한국 정부가 먼저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의 평가 및 상응 조치를 기다리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번 해법으로) 물컵에 비유하면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물컵 이론’은 사전협상을 통해 합의를 이루고, 발표한다는 의례(프로토콜)를 벗어나 한국 대통령이 먼저 결단하고, 일본 총리의 호응을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외교의 신기원이다.

윤석열 정부가 여러 차례 계승 의사를 밝힌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비교해봐도 묘하게 뒤틀려 있다. 1998년 10월 8일, 발표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시작은 같은해 1월 있었던 한일 어업협정에 대한 일본 측의 일방적 파기였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일 간 정책 문제가 불거졌고, 수습 과정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청산’이 아닌 ‘정리’가 이뤄졌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던 조세영 전 외교부 1차관 회고에 따르면 “과거사를 청산했다고 선언하면 훗날 다시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한국의 입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정리로 유도한 결과”였다.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체결한 박근혜씨를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은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닌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청산을 경계했다는 의미다.

지난 3월 15일 최상목 경제수석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공급망 파트너’, ‘수출 기여’, ‘과학기술 협력’ 등을 이유로 꼽았다. 모두 정책 사안이다. 그런데 정책 문제에 대한 구체적 협상에 앞서 한국 대통령이 ‘강제동원 문제 해법’과 ‘번복 방지’를 언급했다. 협상장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일본 측 요구사항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일 관계개선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한국에만 나타나느냐는 점이다. 공급망·교역망이 거미줄처럼 얽힌 현대 경제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협상의 균형추부터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이 ‘완전히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부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방안이 발표된 지난 3월 6일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또 한 가지 문제는 역사와 미래가 등가교환 대상이 맞느냐는 점이다. 양금덕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다. 정부 논리대로라면 이들이 맞을 내일은 적어도 정부가 구상하는 미래에 포함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지난 3월 16일 2018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자산을 받아내기 위한 추심금 소송을 제기했음을 밝혔다. 1965년 이래로 정부, 피해자, 수혜자 이 삼각구도가 반복되고 있다. 가해국 일본만 빠졌다.

일본의 입장 계승 외교

지난 3월 15일 포스코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40억원의 기부금을 납부했다고 발표했다. 1965년 대일 청구권 협상으로 받은 일본 측 자금으로 수혜를 입은 곳은 모두 16개 기업으로 확인된다. 포스코를 제외한 나머지 5곳은 “정부 요청이 올 경우 출연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머지 10곳은 “출연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기여해주길 바라고, 기업은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청하면 나선다는 입장이다. 입장이 갈리는 것은 출연금의 꼬리표가 ‘제3자 변제’, 즉 불법적 행위로 인한 손해에 대한 ‘배상금’이라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미쓰비시가 배상금과 관련한 어떤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 전범기업임을 부인한 결과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은 “일단 배상 자체를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부분인가 하는 점에서 의문”이라며 “과거 한일협정 때나 노무현 정부 때도 굳이 위로금, 지원금, 보상 등의 단어를 쓴 것은 강제동원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3자 변제 개념이 배상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돈 받을래, 말래’라고만 윽박지르는 것 같아 서글픈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양 할머니를 비롯한 생존 피해자 2명은 “동냥해서 주는 것 같은 돈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3월 15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전쟁기념관 입구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대일 굴욕외교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각종 여론조사에서 강제동원 해법에 대한 반대 여론이 60%를 넘나들고, 주요 대학가에서는 시국선언이 나왔다.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 등 전문가들 역시 우려 목소리를 내지만 윤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대국적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외교 문제를 국내정치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일갈했다. 윤 대통령이 밀어붙인 결과 지난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이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크게 되돌린 것, 새로운 것, 변하지 않는 것 등이 결과로 나타났다.

이날 양 정상은 셔틀 외교 재개에 합의했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한·미·일 안보 협력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또 일본은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3종과 관련한 수출규제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고,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정상화도 선언했다.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한 결과는 일본과의 관계를 과거로 되돌린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나를 양보하면, 또 다른 하나가 새롭게 요구되는 현상은 어김없었다. 일본 NHK는 한일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과) 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 양국 간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한국 측에게 요구했다”며 “시마네현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명’)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입장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고, 나올 리도 없다”고 부인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즉답하지 않았다. 진실공방과 별개로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대체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느냐’가 새로운 화두가 됐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양국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발표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치는 어려운 관계에 있었던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며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인식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말했다. 별도의 사죄 표현은 없었다. “평가한다”, “계승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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