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할아버지, 이제 우리들이 사랑할 차례

한겨레 2023. 3. 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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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박성훈의 브루더호프 이야기]

다비드 할아버지를 위해 독일 노래를 불러주는 브루더호프 형제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러 길을 나서니 마을 곳곳이 하얀 연기로 가득합니다. 연못가 옆에는 타일러가 동생과 함께 열심히 장작을 팹니다. 바야흐로 메이플 시즌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곳곳마다 헛간을 지어 우드스토브를 설치하고 그 위에 커다란 팬을 놓고는 나무 장작을 넣어 단풍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끓여 메이플 시럽 만드느라 공동체 마을 전체에서 달달한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저희 가족도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 아이들과 함께 메이플시럽을 만들곤 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다 크고 저도 힘에 부쳐 재작년부터 메이플시럽 만드는 일을 중단했지만 젋은 아빠들과 어린 아이들이 열심히 수액을 모아 메이플시럽을 만드는 것을 보니 우리 아이들과의 소중한 추억도 생각나 다른 가족이 끓이는 메이플 수액을 기웃기리며 추억에 잠겨봅니다. 메이플릿지 학교에서 운영하는 메이플시럽 헛간에서 아이들이 열심히 장작을 나르는 모습도 참 대견하고 보기 좋네요.

장작 패기.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이맘때면 매년 저도 바빠지는데 바로 제 아내의 생일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곳에선 집에 딸이 있거나 가족으로 있는 싱글 자매가 있으면 생일 맞은 자매를 위해 머리에 쓸 예쁜 화관을 만들어주고 생일날 아침에 먹을 패스추리나 케이크를 만들어 주지만 저희 집엔 남자들밖에 없어 주로 제가 아는 자매들에게 부탁하곤 했는데 올해는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일주일 전부터 옆집에 사는 수잔나가 아내를 위해 생일 화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 다른 두 자매도 생일 아침에 먹을 패스추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누구를 골라야 할지 기쁜 고민에 빠집니다. 덕분에 제 일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장작 나르기.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아내는 초등학교 5학년인 아니타와 캐런과 평소 가깝게 지내는 로즈 자매를 생일 아침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희집 생일 아침식사는 구운 김에 따뜻한 밥과 스팸을 넣어 싸먹는 것입니다. 유빈이가 스팸을 굽는 동안 저는 파와 참기름을 살짝 넣은 한국식 계란말이도 만들어 아내가 좋아하는 아보카도와 함께 식탁에 올려 놓았습니다. 오전 6시30분이 되자 생일 식사 손님들이 들어옵니다. 특별히 손님들 접시에는 한국에서 보내온 한국 전통 문양과 전통 의상 그림이 있는 스티커와 초코하임을 하나씩 올려 놓으니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합니다. 아니타와 캐런은 자기 가족이 만든 메이플시럽을 생일 선물로 가져왔네요. 제일 반가운 선물입니다.

아니타와 캐런은 구운 김을 먹어 본 적이 없어 과연 잘 먹을까 좀 걱정이 되었는데 기우였네요. 밥 한톨 남기지 않고 김과 스팸, 계란말이 모두 깨끗하게 비웠네요. 나중에 캐런과 아니타가 집에 돌어가서는 하루종일 자기들이 먹은 것을 자랑하며 신나 했다는 말을 들으니 참 흐믓합니다. 아니타 아빠는 제게 와서 2주 후면 자기 딸 아니타가 생일인데 저희 가족이 서프라이즈 손님으로 와 가족이 먹는 밥과 김과 스팸을 해주면 좋겠다는 청탁이 들어옵니다. 몇년 전에 유빈이 친구 레놀드도 유빈이 생일날 아침에 초대받고는 집에 돌아가 엄마한테 자기도 유빈이처럼 생일날 밥이랑 김이랑 스팸을 해달라고 졸랐다고 하던데 한국식 아침식사 인기는 식을 줄 모르네요.

브루더호프 아이들의 생일 축하 그림.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기분 좋은 아침식사로 행복한 하루를 열었습니다. 아내가 일하는 일터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아내를 위해 생일 축하 그림을 그려 벽에 붙여 놓아 아내와 보는 이들의 마음에 기쁨을 선사하네요. 함께 일하는 자매들도 아내를 위해 작은 생일 파티도 열어주고 아내가 길을 걷는데 옆에서 공놀이를 하던 3~4학년 아이들이 하나둘씩 아내 곁으로 오더니 생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결국은 반 전체가 아내를 졸졸 따라오면서 생일 노래를 불러주어 제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습니다. 집에 오니 4살짜리 브랜던도 생일 축하하는 그림을 그려 보내주고 메이플릿지뿐만 아니라 다른 공동체에서도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는 카드를 여기저기서 보내주어 형제 자매들의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져옵니다. 특별히 우리 아이들의 할머니 역할을 해주시던 수잔 할머니는 직접 꽃잎을 말려 만든 예쁜 카드와 책갈피를 선물해 주셔서 할머니의 사랑에 마음이 찡해옵니다. 이렇게 온 공동체 식구들의 사랑에 아내는 행복한 하루를 보냈네요.

다음날 아침 다비드 할아버지와 애니 할머니 집에 이분들이 좋아하는 유자차를 드리러 갑니다. 오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 45주년입니다. 우리 가족이 12년 전에 영국 비치그로브 공동체에서 이곳 메이플릿지에 이사 왔을 때 다비드 할아버지, 애니 할머니는 우리 아래층에 사셨습닌다. 이분들은 아직 공동체생활에 익숙하지 않던 우리를 위해 늘 먼저 다가오셔서 우리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에 초청하시어 찬찬히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일은 메이플시럽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메이플 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불을 때 밤새 끓이는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내가 번갈아가며 나무를 지폈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너무 지펴 그만 시럽을 몽땅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허드슨 강가에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1m 가까이 되는 스트라이퍼 물고기도 잡아보고, 하빈이는 할아버지에게서 나무 터닝하는 것을 배워 나무로 만든 촛대, 접시 등을 배웠습니다.

브루더호프 아이들의 다비드 할아버지 생일 축하 카드.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다비드 할아버지는 카드 게임을 좋아하셔서 가끔 저녁에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500 카드 게임을 하시곤 했습니다. 이 게임은 편을 짜서 하는 게임으로 주로 나는 할아버지와, 내 아내는 애니 할머니와 편이 되어 게임을 했습니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실수라도 해서 질 것 같으면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화를 내십니다. 그러고는 내 아내와 애니 할머니팀이 지기라도 하면 껄껄걸 웃으시며 얼마나 통쾌해 하시는지 정말 아이 같이 즐거워하는 마음에 저도 함께 통쾌해하며 웃음을 보태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소 씩 웃으시면서 독일 사투리로 내게 농담을 툭툭 건네시며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일들, 본인이 살아온 일들을 잘 나누어 주시곤 했는데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과 깊은 정이 느껴져 대할 때 마다 내 마음이 행복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부르더호프 공동체에 조인한 2세대로 지금은 아들, 손주들과 함께 4세대가 이 공동체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데 할아버지의 조상은 독일 황제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비드 할아버지도 젊었을 때는 잘나가는 건축가였고, 몸이 아프시기 전까지는 저희 공동체가 판매하는 가구를 디자인하시곤 했습니다.

몇해 전 내가 틱으로 인해 병원에 며칠간 입원하고 퇴원하고도 기력이 없어 한달 동안 집에서 쉬어야 했는데 이때 다비드 할아버지가 제 아내에게 찾아왔습니다. 당신 남편이 아파 누워 있으니 그동안 당신 남편이 하던 프로젝트를 자신이 도와 끝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은 장애인 아동 병원 건설을 돕는 바자회를 위해 도마를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아픈 바람에 모든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평소 제가 하던 일을 지켜보시던 할아버지께서 나서서 직접 도마들을 멋지게 완성시켜주신 것입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그해 바로 전에 심장이 안 좋으셔서 심각하게 아프셨는데 조금씩 회복되셔서 그제야 자유롭게 걸어다시니며 활동하시는데도 형제에 대한 사랑이 그의 연약함을 이긴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그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마음 깊이 울려옵니다.

다비드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 몸이 좋아지시는 듯하더니 작년부터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셔서 이제는 젊은 형제들이 할아버지 곁에서 돕고 있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면서 기력이 나시면 공장에 나오셔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록들을 만드십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격려하기 위해 저와 제 아내는 얼마 전 할아버지 댁에 찾아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한국 군만두와 새우, 한국 배를 대접해 드리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했던 일들을 추억하며 그동안 저희 가족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몸이 아프신데도 한국 배를 너무 좋아하시면서 모두 다 드시고 만두와 새우도 좋아하셔서 보는 저희도 참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메이플릿지 형제, 자매들의 이 두 분의 결혼 45주년을 위해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식당 벽에는 학교 아이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림과 함께 벌들을 그려 붙여 놓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벌을 길러 양봉을 하셔서 특별히 아이들이 벌을 그린 것인데 할머니 옆에 여왕벌 그림이 있는 것이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합니다.

브루더호프 아이들이 다비드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담아 그린 그림.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맛있는 식사가 끝나가자 사회를 보는 형제가 광고를 합니다.

“다비드 할아버지와 애니 할머니를 위해 독일 노래를 불러 주고 싶은 형제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평소 이런 축하의 만찬이 있으면 다비드 할아버지께서는 독일 유산이 있는 형제들을 불러 모아 독일 노래를 불러주곤 했는데 이제는 할아버지를 위해 형제들이 발벗고 나섰습니다. 할아버지께 사랑의 빚을 너무나 많이 진 저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독일어는 몰라도 당당하게 기쁨으로 나가 형제들과 함께했습니다. 다비드 할아버지께서도 아프신 몸을 추스려 앞으로 나오시더니 형제들과 함께 서십니다. 형제들이 독일어로 두분께 축하의 노래를 부르자 지켜보는 모든 형제, 자매들의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축하의 노래가 끝나자 다비드 할아버지와 애니 할머니께서는 자매들이 두 분을 위해 예쁘게 만든 웨딩케이크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이 웨딩케이크를 먹으며 할아버지께서 다시 힘을 내시고 강건하시길 기도하면서 저녁 예배 때 공동체 모든 형제, 자매들이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가시 전에 불러드린 독일 노래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아름다운 이곳에서

이 저녁 보리수 나무 아래서 모이네

이 저녁 보리수 나무 아래서 모이네

수많은 날들 모여서 즐겁게 노래 부르네

골짜기 가득히 노래소리가 울리네

골짜기 가득히 노래소리가 울리네

주님을 위해 싸우고 주님을 위해 살면은

우리가 주안에 하나되어 산다네

우리가 주안에 하나되어 산다네

형제여 이젠 우리가 밤인사 해야 할 시간

주님의 선하심 우릴 밤새어 지키리

주님의 선하심 우릴 밤새어 지키리

글 박성훈/미국 브루더호프공동체 메이플릿지 거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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