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 아내 뺏은 불륜男…"이래도 되나" 금지된 사랑의 끝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3. 3. 18.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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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9C '천재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붓 꺾을 위기' 구해준 평론가 '은인'
그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그런데도 인생 행복했다고?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세부 이미지. 영국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테이트미술관 소장

아무리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 해도, 당신은 내 은인의 아내야. 자꾸만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당신이 그린 그림처럼.

1854년 영국 런던,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두 남녀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을 겁니다. 남자는 유명 화가였던 존 에버렛 밀레이. 밀레이는 매일같이 드나들던 은인의 집에서 그의 아내, 에피 그레이를 보고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오필리아 전체 이미지.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자신이 사랑하는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자 미쳐버려 스스로 강에 빠져 익사한다.

그레이도 머지않아 밀레이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갈수록 둘의 사랑은 깊어졌고, 급기야 그레이는 남편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막 내려는 참입니다. 지긋지긋했던 결혼 생활을 끝내고 밀레이와 새 출발을 하려는 거지요. 도대체 이 남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밀레이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매장당할 뻔한 ‘그림 신동’, 은인 덕에 기사회생

밀레이의 자화상(1881).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이었을 듯 하다. /우피치미술관 소장


1829년 영국에서 태어난 밀레이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그림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밀레이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왕립예술원을 찾아가 “얘는 천재니 얼른 입학시켜달라”고 다짜고짜 요구한 게 9살 때. 소년을 힐끗 본 왕립예술원 회장은 당연히 코웃음을 쳤습니다. “화가는 무슨 화가. 굴뚝 청소부 훈련이나 시키세요.”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레이의 그림을 하나하나 보여줬습니다. 회장의 눈이 점점 커졌습니다. “얜 뭡니까. 천재인가요?” “아까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호호.”

아무리 그래도 9살은 왕립예술원에서 공부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밀레이를 기초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밀레이는 11살의 나이에 왕립예술원에 들어갔습니다. 왕립예술원 역사상 최연소 입학생의 탄생이었습니다.

왕립예술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미술을 주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밀레이가 보기에 이런 미술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밀레이가 1848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일종의 비밀 조직인 라파엘전파(르네상스 거장인 라파엘로 이대세였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는 유)를 결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결성 이듬해 밀레이는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렸습니다. ‘이 훌륭한 작품을 보면 사람들도 우리 생각에 공감하겠지.’ 완성된 작품을 본 밀레이는 뿌듯했습니다.

'부모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1849). 실수로 손바닥을 못에 찔린 소년 예수는 피를 흘리고 있고, 가족들은 이를 걱정하고 있다. /테이트 소장


그림 세부. 손바닥에 난 상처는 훗날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어머니 마리아는 소년 예수의 상처를 보고 걱정이 가득하다. 잘 그렸지만 처음 발표했을 땐 "불경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밀레이의 그림에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대표적입니다. “성스러운 가족을 무슨 술주정뱅이와 거지처럼 그렸다.” 화가로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한 밀레이. 그를 구해준 건 권위 있는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낸 밀레이와 그 동료들이야말로 영국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만들 사람들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밀레이의 '마리아나'. 아름다운 여성이 수를 놓다가 잠시 일어서서 허리를 젖히고 몸을 풀고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영감을 받은 시인 테니슨의 '마리아나'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시에서 여인은 떠나가버린 연인을 허망하게 기다린다. 섬세한 색채 및 세부 표현이 일품이다. /테이트 소장


미술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극찬에 여론은 단숨에 반전됩니다. “러스킨 말을 듣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니, 엄청나게 잘 그리긴 했네….” 러스킨이 크게 돕긴 했지만, 밀레이의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났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이후 밀레이는 러스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합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 연인'(1851~1852). 라파엘전파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157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가톨릭 세력의 신교도 학살을 다룬 작품이다. 젊은 여성은 연인의 왼팔에 '카톨릭 신자의 상징'인 흰색 완장을 두르려 하지만, 남성은 여인을 부드럽게 제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영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라파엘전파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개인소장


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았던 1853년 여름, 러스킨은 자기 집으로 밀레이를 초대합니다. 제자처럼 아끼는 밀레이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지요. 밀레이는 그곳에서 러스킨의 아내인 그레이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은인의 아내와 ‘금지된 사랑’

밀레이가 그린 러스킨의 초상화(1853~1854).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까맣게 모르는 듯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애슈몰린 박물관 소장


잠깐 시간을 5년 전으로 돌려 봅시다. 1848년 영국의 한 교회, 29세의 러스킨과 19세의 그레이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러스킨은 영국에서 이름 높은 지식인이었던 데다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습니다. 그레이는 발랄한 성격의 매력적인 여성이었지요.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러스킨과 그레이의 결혼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둘의 성격부터가 정반대였습니다. 러스킨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그레이는 거침없는 외향적 성격이었거든요.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둘이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세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오늘날까지도 여러 추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러스킨에게 육체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 다였을지도 모릅니다.

1853년 밀레이가 그레이를 그린 스케치. 밀레이는 이 여자가 자신과 결혼할 줄 알았을까? 오른쪽 아래, 멋을 한껏 부리면서도 떨리는 듯한 서명 필체를 보니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을 법 하다.


'석방 명령'(1852~1863). 그레이를 모델로 여성의 얼굴을 그렸다. 그레이는 어머니에게 "내가 그림의 모델이 돼서 매우 기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림의 내용은 18세기 영국 내전 중 포로로 잡혔던 병사를 아내가 구한 이야기를 다룬다. /테이트


그렇게 불행한 세월을 살던 그레이의 눈에 밀레이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자꾸 보다 보니 괜찮은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성격도 쾌활했거든요.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마침내 그레이는 결혼생활 속사정을 밀레이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망설임도 잠시, 둘은 힘을 합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1854년 그레이와 러스킨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내고 맙니다. 이듬해 둘은 결혼했습니다.

육체적인 의미의 간통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의미론 불륜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물어뜯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지요. 밀레이는 ‘은인 뒤통수를 친 불한당’, 그레이는 ‘남편을 배신한 천벌을 받을 여자’가 됐습니다. 러스킨은 ‘아내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뒤에서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따지고 보면 러스킨도 잘못이 있다”고요.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애초에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쨌거나 밀레이와 그레이의 금슬은 좋아서 자식을 8명이나 낳았습니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밀레이는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좀 상업적으로 바꿨습니다. 이를 본 비평가들은 “밀레이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술과 타협하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밀레이의 '비누거품'(1886). 비누 회사 페어스의 광고 포스터 이미지이자 포장지로 쓰이면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한편 비평가들에게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과거·현재·미래 중 중요한 건

여기까지는 흔한 막장 이야기인데, 결말은 좀 다릅니다. ‘그 사건’ 후 셋 다 행복했거든요.

러스킨은 적성에 안맞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일에 집중한 덕분에 러스킨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예술 비평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습니다. 러스킨은 밀레이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몇 번 쓰기도 했습니다. 이전처럼 열렬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평이었습니다. 정말로 밀레이를 깊이 원망했다면 그러진 않았겠지요. 

'낙엽'(1856). 스산한 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네 명의 소녀가 마당에서 끌어모은 낙엽을 태우고 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과 무덤을 연상시키는 낙엽 더미가 타들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인 대비를 이룬다. 밀레이는 가을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낙엽 타는 냄새를 특히 좋아해 ‘지나간 여름의 향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삼았다. 이 작품에서 낙엽 더미를 둘러싼 소녀들이 각기 짓는 표정은 삶과 죽음을 대하는 저마다의 태도를 상징한다. 왼쪽 끝의 소녀는 낙엽 태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고, 그 오른쪽에 있는 소녀는 움켜쥔 낙엽을 더미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그 옆의 소녀는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고, 손에 과일을 든 소녀는 낙엽더미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림은 소녀와 낙엽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소재를 통해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세련되게 드러내고 있다. 러스킨은 "황혼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첫 사례"라고 소개했다./맨체스터 시티 아트 갤러리 소장


밀레이 역시 화가로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고, 훌륭한 그림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자신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말년에는 귀족 작위도 받았고 지난주 소개한 프레데릭 레이턴 다음번으로 왕립예술원 회장도 지냈습니다. 그레이는 결혼 취소와 재혼 사건으로 명예가 실추되는 바람에 영국 왕실의 행사에 초대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좀 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레이의 생활은 부유하고 행복했습니다. 밀레이보다 한 해 먼저(1828년) 태어난 그녀는 밀레이가 세상을 떠난 1년 뒤(1897) 잠듭니다.

'나의 첫번째 설교'(왼쪽)와 '나의 두번째 설교'(오른쪽). 자신의 딸을 모티브로 그린 이 연작은 큰 인기를 끌었다. 난생 처음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을 때는 긴장한 마음에 애써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두번째 설교에서는 그만 잠들어버리고 만 아이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화가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잘 느껴진다.


에피 그레이의 초상화(1873). 그레이가 45세때 그린 그림이다. 당당하고 편안해 보인다./퍼스 박물관 소장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 그레이와 러스킨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사랑이든 직업이든 투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주변의 시선이나 비난이 신경 쓰일 수도 있고, ‘본전 생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과감하게 키를 돌려 자신의 길을 가는 게 행복의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과거는 흘러갔고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뿐이니, 스스로 떳떳하다면 방향을 틀어서라도 행복을 거머쥐어야지요.

'글렌 버남'(1890). 말년에 들어 밀레이는 '돈이 덜 되는' 풍경화에 천착했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해석이 많다.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 소장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 중엔 뭐가 더 중요할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밀레이는 ‘현재’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이렇게 답했으니까요.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찬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서 먼지가 됐을 텐데.”(라파엘전파 동료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지금 밀레이의 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참 좋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하면, 미래에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가 밀레이의 그림인 듯 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본문의 정보는 Robert Brownell의 저서 ‘Marriage of Inconvenience’, Jason Rosefeld의 저서 ‘John Everett Millais’, 옥스포드 미술사전, 테이트와 영국 내셔널갤러리를 비롯한 주요 미술관들의 홈페이지에서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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