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총리의 ‘외설적인 사진’ 한장...사내들의 몰락을 불러온다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3. 18.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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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이제 남은 건 오직 노벨문학상뿐인 작가”란 수식어가 이렇게 어울리는 소설가가 또 있을까.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언 매큐언의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이 출간됐다. 소설 ‘위험한 이방인’과 ‘검은 개’가 부커상 후보에 올랐고, 이어 발표한 장편 ‘암스테르담’으로 이언 매큐언은 생애 첫 부커상을 받았다. “완벽하게 짜인 다크한 걸작”(뉴욕타임스), “치명적인 탄환처럼 빠르고 언론의 헤드라인처럼 시의적절하다”(퍼블리셔스 위클리)란 평을 받은 명작이다.

주인공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서 이야기는 열린다. 몰리는 레스토랑 평론가이자 사진작가로, 수많은 염문을 뿌린 여성이자 외무장관의 정부(情婦)였다. 유력 신문 ‘저지’의 편집국장 버넌, 교향곡 작곡가 클라이브가 몰리의 장례식장에 동석한다. 버넌과 클라이브는 오래 전 서로 다른 시기 몰리의 동거인이었다. 둘은 몰리와 이별한 후로도 몰리를 중심에 두고 우정을 나누며 살아왔다. 버넌과 클라이브는 몰리와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의 불륜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

어느 날, 신문사 ‘저지’ 편집국장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몰리의 법적 남편 조지 레인의 전화다. 통화로 설명할 수 없으니 당장 자신의 집에서 만나자는 것. 그때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가 버넌을 찾아와 법원 명령서를 내민다. 사진술을 이용한 모든 복제물과 판화, 스케치 채색화를 비롯해 가머니의 외관을 연상시키는 자료의 간행과 인쇄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버넌은 확신한다. 죽은 몰리의 유품에서 가머니의 ‘공개돼선 안 되는’ 사진이 발견됐음을.

버넌은 안 그래도 고민이었다. 자신이 선장이 되어 지휘하는 ‘저지’의 구독자는 직전 달에 비해 7000명 감소했다. 버넌의 전임자를 제외하고 신문사 ‘저지’에서 해고됐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편집국엔 ‘문장만 깔끔하면 신문이야 망하든 말든 나 몰라라 할 부류들’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교수형 차례는 버넌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차기 총리로 유력한 외무장관의 인생을 끝장낼 아주 예리한 메스가 눈앞에 놓인 것이다. 조지에게서 미리 사진을 확인한 버넌은 경매 시작가의 네 배를 지불하고 가머니 사진 3장을 전격 입수한다.

사진의 내용은 이랬다. 수수한 7부 길이의 원피스를 입고 모델처럼 캣워크를 하는 포즈를 취한 ‘남성’ 외무장관의 요염한 사진. 클라이브는 위험한 선택을 하는 버넌을 비난한다. 게다가 이건 몰리를 배신하는 행위이며, 가머니의 사진은 독자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라고 쏘아부친다. 하지만 버넌도 명분이 없지 않았다. 복잡한 사생활 이면에서, 가머니는 정치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펴는 강경론자였다. 버넌은 그를 이대로 두면 11월에 총리로 지명될 것이라며 친구 클라이브의 비난을 뒤로 한 채 공개를 선택한다.

버넌이 가머니의 사진이 실린 1면을 데스크에 먼저 보여주자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진심어린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가로 8단 전체에 세로 지면 4분의 3 크기였고, 신문은 제호를 제외하고 글자라곤 단 한 줄의 고딕체 헤드라인뿐이었다.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 버넌은 이날의 신문이 매스컴 역사에서 ‘1면 톱의 고전’이 되고도 남을 것이며 훗날 언론학과 수업 교재로 쓰이리라고 확신, 또 확신한다. 그러나 세상 일이 이렇게 쉽게 흘러가던가. 신문 1면은 공개되기도 전에 가머니의 계략으로 완벽하게 빛이 바래고, 버넌은 비참하게 짤린다. ‘벼룩’이란 소리를 들어가면서.

소설 ‘암스테르담’은 언론사 이야기이지만 언론사 이야기가 아니다. 이 위험한 소설은 현대인의 위선을 낱낱이 까발린다. 매큐언은 나이가 들어버린 모든 인간이 확신범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의 비(非)윤리를 이 책 한 권에서 설계했다. 매큐언은 쓴다.

‘별 볼일 없고 편협한 결벽증을 윤리적 관점으로 여기면서 정작 자신은 말 그대로 오물 위에 천막을 치고 사는 놈. 보잘 것 없는 이익을 위해서 약점 많은 바보들이나 파멸시키며,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 (중략) 자신은 본인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보다 높은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한다.’ 동시대의 윤리는 매큐언의 차가운 청진기같은 문장 속에서 낱낱이 해부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에게만 명대사가 주어진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중이다.

버넌을 질타한 클라이브는 사실 더 윤리적이지 못한 인간이다. 내각에서 교향곡 작곡을 위촉할 정도로 유명한 작곡가인 클라이브는 영감이 부서지는 걸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한 여성 등산객의 희생을 외면한다. 이름 모를 한 여성이 눈앞에서 강간 당하도록 내버려둘 각오를 하면서까지 만든 멜로디는 과연 귀 기울일 가치가 있을까. 작가는 버넌과 클라이브를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 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로 정의한다.

왜 ‘암스테르담’이 소설 제목일까. 모든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모든 맨얼굴이 폭로된 뒤 버넌과 클라이는 암스테르담에서 재회한다. 약간의 스포일러. 둘은 암스테르담에서 서로를 동시에 독살한다. 왜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이는지는 소설 후반부에서 확인하자. 버넌이 이성을, 클라이브가 감성을 상징한다는 상상력까지 더해본다면 200쪽짜리 그리 길지 않은 책의 질량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죄에 둔감해지고 얄팍한 인간이 설쳐대는 시대, 버넌과 클라이브는 모든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이언 매큐언 소설 ‘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 Annalena McAf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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