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90년 전 진주 출신 작곡가가 쓴 이 노래, ‘호남의 상징’되다
1935년 1월28일자 조선일보에 특이한 광고가 실렸다. ‘오케-레코드’가 낸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이었다. 오케레코드는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등 인기 가수들을 거느린 음반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나 SM급 기획사였을 것이다. 광고는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 등 10개 도시를 소재로 한 노랫말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10대 도시찬가 모집’이란 제목을 크게 달았다. 2월15일자 신문에도 같은 광고가 실렸다. 응모 마감은 2월말이었다.
이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일제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널리 불리는 노래가 탄생했다.’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하는 ‘목포의 눈물’이다. 노랫말을 쓴 문일석은 목포 출신 시인이라는 사실만 전할 뿐, 구체적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손목인은 1992년 낸 회고록 ‘못다부른 타향살이’에서 ‘목포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던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과 동향지기’로 ‘아깝게도 일찍 타계했다’만 썼다.
◇고복수 ‘타향살이’작곡한 신진 작곡가
목포와 호남을 넘어 ‘국민 애창곡’이 된 ‘목포의 눈물’을 진주 출신 작곡가가 썼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도쿄 제국음악학교에 다니던 손목인(1913~1999)은 원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던 정통 클래식 전공자였다. 손목인은 1934년 친척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서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고복수의 ‘타향살이’(원제 타향)를 썼다.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철 오케레코드 사장은 1935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한 손목인에게 ‘목포의 눈물’가사를 내보이며 작곡을 의뢰했다.
가사를 받아든 손목인은 ‘구슬픈 멜로디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별과 한(恨)을 품은 노랫말 때문이었다.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로 시작하는 2절은 원래 ‘삼백년 원한품은’을 대신한 것으로, 임진왜란부터 강제병합까지 망국의 한을 노래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이 노래가 인기를 끌자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이철 사장 이하 직원들을 소환, 조사했다. 2절의 첫 대목 가사를 문제삼았다. 음반사측은 ‘원한 품은’이 아니라고 끝까지 버텨서 문제없이 풀려났다고 한다.
◇'이난영은 타고난 가수, 히트할 것 같은 예감 들었다’
‘목포의 눈물’의 성공은 이 노래를 부른 이난영의 독특한 음색에 힘입은 바 크다. 손목인은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고 곡을 주면 나름대로 기교를 부릴 줄 아는 것으로 보아 타고난 가수라는 것을 느낄 수있었으며 꼭 히트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손목인은 이난영이 ‘당시 오사카 ‘태양극단’의 막간가수로 활동하던 신인이었는데, 오케레코드 본사측인 일본 데이치쿠(帝蓄) 레코드사에서 발굴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1933년11월13일 이철 오케레코드 ‘지점장’이 가수 등 15명과 함께 오사카로 레코드 취입차 출발하면서 신문사에 인사차 방문했는데, 여기에 열일곱살 이난영의 이름이 나온다.(’오케-일행 14일 취입행’,조선일보 1933년11월17일). 신일선 나품심 박부용 문호월 등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였다. 열일곱살 이난영은 이미 일본에 건너가 음반을 녹음할 만큼 주목받는 신인이었다.이난영은 오케레코드가 그해 12월21일~22일 경성공회당에서 도시 빈민들을 돕기 위해 연 자선음악회에 신일선, 나품심과 함께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 공연엔 명창 임방울, 만담가 신불출 같은 전통 예인들도 출연했다. 특히 손목인도 함께 무대에 올랐다. 둘은 ‘목포의 눈물’이전에 상대방의 실력을 꽤 알았을 것이다.
◇연거푸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점점 더 매혹
조선일보 1935년 신년 특집에도 당대의 스타인 레코드 여가수 16명을 꼽으면서 이난영을 포함시켰다. ‘양(孃)의 특장은 애수를 품은 가벼운 유행가도 몇번 연거푸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점점 더 매혹되는 점이외다. 양은 성악에 특재가 있는 위에 다시 피아노, 바이올린 등 기악에 능하며 영롱한 성격, 뛰어난 총명은 양으로 하여금 사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도록 만들었다’(‘레코드 여가수’, 조선일보 1935년 1월3일)고 호평했다. 목포 출신 열아홉살 신인가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하나로 가요사에 오래도록 이름을 남긴 인물이 됐다. 이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5만장 넘게 팔려나갔다.
◇90년 가까이 이어진 유행가 ‘목포의 눈물’
다시 손목인이다. 그는 오케레코드 지원으로 일본 고등음악학교로 진학, 작곡과 편곡, 관현악 등 클래식 음악을 계속 공부했다. 1936년 졸업후 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돌아왔고 오케 전속 C.M.C 밴드를 조선 최초의 스윙밴드로 키웠다. ‘사랑도 싫소 돈도 싫소’ ‘아빠의 청춘’ ‘바다의 교향시’ ‘슈샤인 보이’ 등 2000곡 가량을 작곡했다. 광복 후 손목인의 삶도 곡절이 많았다. 1952년 일본에 밀항해 전후 일본의 히트곡 ‘카스바의 여인’을 작곡해 인기를 누리다 불법입국자로 몰려 1957년 귀국했다. 월남전에 위문공연을 다녔고, 미국에 오래 머물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 사이 ‘목포의 눈물’은 호남 연고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 응원가로 쓰일 만큼 면면하게 생명력을 이어갔다. 증조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를 손주뻘 청년들까지 이어부른 셈이다. ‘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이 숨을 거둔 건 일본 여행길이었다. 1999년1월9일 도쿄에서 숨진 그의 부고 기사 제목은 ‘타향서 떠난 타향살이’였다. 마침 한 달 뒤면(4월23일) 손목인 탄생 110주년이다.
◇참고자료
장유정, 행(幸)과 불행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 2016
최유준, 이난영의 눈물, 한국인물사연구 20, 2013
박찬호, 한국가요사,현암사, 1992
손목인, 못다부른 타향살이-손목인의 인생찬가, HOT WIND,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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