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여성 여러분”

기자 2023. 3.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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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 여성 중 자신의 어머니를 ‘엄마’ 대신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씨라고. 듣기에 따라 다소 예의 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이유가 있다. 누구의 딸로 태어나 누구의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평생 사회적 이름을 가질 기회가 적었던 엄마에게 이제라도 제 몫의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 나를 낳고 기른 엄마로서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엄마를 재인식하겠다는 의지. 딸이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엄마’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훼손될까? 아니다. 그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그의 인생이 존중되고 사회적 의미가 확장되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를 호명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가진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2019년 방영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에는 알츠하이머를 앓던 노인 김혜자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중 한 대목은 이렇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 당부의 수신인은 누굴까? 대부분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까지만 주로 인용하지만 나는 이 내레이션은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까지 읽어야 의미가 온전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앞 문장의 의미와 감동이 훼손되거나 축소될까? 마지막 문장 전까지만 읽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을 이 내레이션에 굳이 마지막 문장을 넣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 몫이다.

최근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탄 양자경이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여성 여러분(And Ladies)”이라고 한 부분을 SBS가 자막에서 누락시켜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이 황당했는지 해외 언론에도 소개되었다. 논란이 일자 제작진은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잘랐다”고 해명한 후, 온전한 수상 소감을 내보냈다. 애써 호명하는 것에 의미가 있듯, 이미 호명한 것을 굳이 지우는 데에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우리 몫이다.

그들은 ‘여성’을 왜 지웠을까? 정말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어떤 문제라도 생기는 것일까? 혹시 그 소감이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싫었던 것일까? 싫었다면 왜? 별별 생각이 다 들지만, 여성의 사회적 맥락을 지우거나 사소한 것으로 여기며 남성을 ‘기본값’으로 설정해온 지긋지긋한 무시와 무례의 역사가 이 사건에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딸들이 엄마의 이름을 애써 부르는 이유나 김혜자가 딸이자 누이이자 엄마였을 이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와 같고, 양자경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여성 여러분”이라고 굳이 붙인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호명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삭제된 이름, 밀려나고 소외된 존재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지평을 넓히는 것. 그러니 여성의 이름을 함부로 삭제하지 말라.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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