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황금빛 ‘키스’ 한글 녹여 옷에 입히다
명화를 만난 패션
이상봉 디자이너는 지난 2012년 한·오스트리아 수교 120주년을 맞아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패션쇼를 진행하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이후 K패션에 관심이 많은 오스트리아 대사관 무역 대표부는 줄곧 이 디자이너에게 자문을 구했고, 특히 올해 개관 300주년을 맞아 ‘키스 NFT’ 발행과 동시에 특별한 이벤트를 고민하던 볼프강 베르그만 미술관장과 이 디자이너를 연결하면서 특별한 협업이 성사됐다.
‘키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꽃으로 가득한 작은 벼랑에서 한 덩어리처럼 포옹하며 입맞춤을 하는 연인의 모습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남녀 모두 찬란한 금빛 옷을 입고 있는데, 클림트가 이 작품을 그린 시기는 실제로 금을 사용해 금박과 금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던 ‘황금시기’였던 만큼 작품 전체에서 발광하는 찬란하고 몽환적인 황금빛은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남성의 옷에는 검정색 네모 문양이, 여성의 옷에선 붉은색·푸른색 동그라미 문양이 도드라진 것도 특징이다.
“정말 부담이 컸어요. 누구라도 한 번쯤 봤을 유명한 그림을 옷으로 재해석한다는 것은 시쳇말로 잘 해야 본전이라는 압박감이 컸죠.” 패션쇼에 올릴 총 65벌의 옷을 준비하면서 이 디자이너가 선택한 방법은 ‘직설법’이었다. “패션 디자이너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홀렸을 색과 문양으로 가득한 작품인데, 이걸 조각조각 해체해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만들기보다는 누가 봐도 이건 클림트의 ‘키스’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직설적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죠.”
“작품을 관통하는 네모·동그라미 문양 사이에 우리의 전통문양인 단청과 한글을 조합했죠. 한글과 단청, 110여년 전 그린 클림트의 작품 모두 과거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선물이잖아요. 그래서 두 나라 문화의 만남, 클림트와 이상봉의 만남을 정직하게 표현했어요. 러시아와 협업할 때는 푸시킨과 김소월의 만남을, 중국과 협업할 때는 이태백과 윤동주의 만남을, 2012년 오스트리아와 협업할 때는 모차르트와 아리랑의 만남을 옷에 녹였죠. 그게 저만의 디자인 협업 방식이죠.”
누군가는 ‘또 한글이냐’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상봉 디자이너는 2006년 파리패션위크에서 처음 한글 패션을 선보인 이래 줄곧 한글을 디자인하는 일에 천착해왔다. 말하자면 ‘한글’은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의 시그니처다. 물론 그 때문에 억울할 때도 많았다.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기 이전, 이미 한글은 이 디자이너의 손에 의해 세계 패션무대에서 독창적이고 뛰어난 미학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선 “촌스럽다”는 소리를 들었다.
“2006년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이 한글패션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지만, 여전히 우리는 익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한글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인색해요.”
‘언제까지 한글만 울궈먹을 거냐’는 소리도 억울하다. 사실 이 디자이너의 한글은 매 시즌 새롭게 태어난다. 때로는 소리꾼 장사익의 물같은 흘림체로, 때로는 화가 임옥상의 불같은 서체로. 때로는 훈민정음 혜례본의 단단한 모습으로, 때로는 우주 속 별처럼 소용돌이치면서. 샤넬의 격자무늬 퀼팅, 디올의 까나쥬(등나무로 엮은 듯한) 패턴, 루이 비통의 모노그램 로고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매 시즌 새롭게 디자인했다며 찍어내는 시그니처 문양들과 뭐가 다를까.
이 디자이너는 “한글은 운명”이라고 했다. 그의 작업실은 여전히 각종 한글 자료들로 넘쳐난다. 창고에는 한글패션을 위해 그동안 직조했던 원단들로 가득하다. 인터뷰 도중 대구에서 막 도착한 황금빛 원단에도 클림트의 ‘키스’를 상징하는 네모 문양과 한글이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19일 무대에 서는 65벌의 ‘클림트×이상봉’ 컬렉션은 오는 5월 오스트리아에서도 패션쇼와 전시를 가질 예정이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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