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봄의 전령’ 매화 이야기

2023. 3. 1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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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조식 등 선조들 사랑 각별
더 늦기전 만개한 매화 즐기길

이제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봄이 왔음을 알리는 지표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봄을 알리는 꽃으로는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도 있지만,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피어난 매화는 그야말로 봄의 전령이다. 매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 전남 광양시에서는 지난 10일부터 19일까지 ‘광양 매화 축제’가 열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중지되었다가 다시 개최되는 매화 축제인 만큼 많은 이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매화를 사랑한 역사적 인물로는 먼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을 들 수 있다. 1000원권 지폐 앞면에는 이황의 초상 오른쪽에 매화가 그려진 것이 보이는데, 그만큼 이황의 매화 사랑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이황은 늘 매화를 가까이했고, 하나의 꽃으로만이 아닌 인격체로 여겨 ‘매형(梅兄)’이라 부르며 술잔을 놓고 시로 대화했다고 한다. 이황이 지은 매화를 주제로 한 시는 107수였으며, 그중 91수를 모아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남겼다. 제자를 가르친 도산서당 곳곳에도 매화를 심었다. 사망하기 직전에 마지막 남긴 말은 ‘매화 나무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 이황의 임종을 지켰던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쓴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는 “선생께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12월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지칭되었던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유적지에서도 매화를 볼 수가 있다. 조식이 후학을 가르친 경남 산청군의 산천재 앞뜰은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인데, 이곳에서는 조식이 손수 심었다는 ‘남명매’를 볼 수 있다. 이외에 산청에는 고려 말 대사헌과 정당 문학을 지낸 강회백(姜淮伯)이 어린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중 심었다는 ‘정당매’가 있다. 산청 남사 예담촌의 ‘원정매’는 고려말의 학자 하즙(河楫)이 심은 것으로 그의 시호가 ‘원정’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5만원권 지폐 뒷면에도 매화가 그려져 있다. 신사임당의 초상이 앞면에 있어서 대부분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생각하지만, 이 매화 그림은 어몽룡(魚夢龍)의 작품이다. 어몽룡은 특히 매화를 잘 그렸는데, 대나무 그림의 유덕장, 포도 그림의 황집중과 함께 삼절로 불렸다. ‘월매도’와 ‘묵매’ 등이 어몽룡의 작품이다. 5000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의 그림이 들어가면서, 5만원권 지폐에는 신사임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 어몽룡의 매화 그림이 들어간 것이다. 조선 후기 매화 그림의 대가는 중인 출신의 학자 조희룡(趙熙龍)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했던 조희룡은 자신에게 매화벽(梅花癖)이 있음을 고백하였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다. 매화에 관한 시 100편을 지어 큰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 가루로 만든 차를 달여 먹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는 조희룡이 그야말로 매화 마니아였음이 나타난다. 조희룡은 두루마리 형식의 대작 매화 그림도 남겼다. ‘홍매대련(紅梅對聯)’이 그것인데, 현존하는 매화 그림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조희룡의 야사집 ‘호산외사’에는 천재 화가 김홍도와 매화의 인연을 보여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김홍도의) 집이 가난해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000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2000을 떼어 내어 매화를 사고, 800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00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김홍도가 그림을 판 돈 대부분으로 매화와 술을 산 후, 벗들과 매화를 감상하며 술자리를 가지면서 ‘매화음’이라 했다는 것이다.

겨울의 기나긴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알리는 자신의 소명을 해마다 하고는 사라지는 매화. 더 늦기 전에 매화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매화에 얽힌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까지 기억하며 찾는다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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