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빈 경제 성과…‘혹’만 붙인 외교
양국 갈등, 한국 책임으로 인정
일본에 ‘과거사 퇴행 길’ 열어줘
수출규제·WTO 제소 취하 교환
‘반격 능력 우려’ 족쇄도 풀어줘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16일 한·일 정상회담은 정부의 ‘대승적·선제적’ 강제동원(징용) 해법 발표에도 일본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해줬다. 윤석열 정부의 ‘덮어놓고 미래로’식 접근은 일본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과거사 퇴행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채 “1998년 10월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직접 사과 표현 대신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명문화한 ‘김대중-오부치 선언’ 계승을 언급한 것이다.
기시다 총리가 말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에는 ‘위안부’ 범죄를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일본의 식민지배·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1995), 식민지배 강제성을 사죄한 간 나오토 담화(2010)도 포함되지만 반성과 사죄를 모두 뺀 아베 담화(2015)도 있다.
또 기시다 총리 발언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핵심인 ‘일본 식민지배로 인한 한국 국민의 손해와 고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날 “사과를 한 번 더 받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추가적인 사과 필요성에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실상은 한국 외교당국이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일본 측에 기시다 총리가 직접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반성과 사죄’를 읽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사과나 진일보한 조치를 내놓지 않는데도 윤 대통령은 “2018년 그동안의 정부 입장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해석과 다른 내용의 판결이 선고됐다”며 한국 사법부 판결이 잘못됐다고 공개 평가했다. 일본 피고기업의 책임을 면해주는 강제동원 셀프 배상안으로 굴욕외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대응을 이끌어내기는커녕 한·일 갈등의 책임이 한국에 있었다고 자인하는 꼴이 됐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17일 “2018년 대법원 판결은 1965년 청구권협정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한 한·일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 채무 해결을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 반영된 것인데 법을 전공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사실관계가 다른 입장을 밝혔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미래를 강조하며 과거를 덮었지만 경제, 안보 분야에서 실질적 성과를 얻었는지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정부는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 수출규제 해제를 성과로 내세우지만 이는 일본이 요구해 온 세계무역기구제소 취하와 맞바꾼 것이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혜택 국가) 회복은 “한국 상황에 달렸다”며 소극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완전 정상화도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이는 협정 종료 효력이 정지된 상태로 운용돼 왔다. ‘미래 파트너십 기금’도 민간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가 설립한 것이라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라고 볼 수 없다.
■일, 독도 영유권 등 갈등 사안 기존 입장 고수
강제동원 면죄부를 받은 후 일본은 더 노골적으로 과거사 문제 퇴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배출,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양국 갈등 현안에 기존 입장만 요구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회담에서 윤 대통령에게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구했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대통령실은 “위안부 문제든 독도 문제든 논의된 바 없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 언급은 있었으나 윤 대통령이 화답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이즈미 겐타 대표는 윤 대통령에게 소녀상 문제 해결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일본 초당파 의원 모임인 일한의원연맹 측은 윤 대통령에게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고 NHK는 보도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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