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민의 노크] 대통령의 격노

문광민 기자(door@mk.co.kr) 2023. 3. 1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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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정치 현장에서 일상화되고 있는 용어가 있다. 바로 '격노(激怒)'다. 격렬하게 화를 낸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지난 정부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기 시작하더니 이번 정부 들어서도 언급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격노'는 주로 대통령실 관계자의 전언에 녹아 있다. 말과 글자로 대통령의 격노를 접하는 일반 국민의 입장에선 이것이 정말 대통령 본인의 감정을 가리키는 말인지, 주변인들이 대통령의 언행을 점잖은 말씨로 과장한 표현인지 알 길이 없다.

이 표현이 꼭 필요한 상황에 한해 절제돼 사용됐다면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내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겠다. 지금처럼 다달이 격노의 전언이 범람하는 상황에선 자신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모습으로 보이거나, 자신이 나서서 수습해야 할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 비치는 역효과만 나타날 뿐이다.

고용노동부가 이달 초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전언이 나왔다. 개편안은 현행 주52시간 근무제에서 최장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바꿔 일이 몰릴 때는 더 일하고, 일이 적을 때는 덜 일하도록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개편안은 '주69시간 근무제'로 잘못 알려지면서 20·30대로부터 빈축을 샀다.

이에 대통령은 홍보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며 또 한 번 격노했다고 한다. 비판의 화살은 고용노동부로 돌아갔고, 개편안은 백지화됐다. 지난해 6월에도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현행 주 단위 연장 근로시간을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근로시간 개편 방향을 놓고 대통령은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했다.

대통령의 격노 사례는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났다. 누가 진짜 '윤심(尹心)'을 대변하는가를 놓고 경쟁이 과열됐던 국민의힘 대표 경선 기간에만 여당 관계자와 대통령실 관계자 등의 전언에선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수차례 나왔다. 무엇이 분하고, 섭섭하고, 억울한지 등 명확한 설명 없이 반복된 전언 속 대통령의 격노가 얼마나 실질적인 효과를 거뒀는지는 당사자와 메신저만이 뼈저리게 알 것이다.

전언의 형식을 빌려 격노라는 표현이 대통령 주변에서 계속 나온다는 점은 안타깝다. 대통령의 감정을 놓고 '화냈다' 같은 일상 표현 대신 존엄하고 고고한 용어로 나타내고 싶은 참모나 주변인의 마음이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격노는 과하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에 걸쳐 조선 임금의 언행을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임금이 격노했다(上激怒)는 기록은 영조실록에서 총 6번뿐이다. 이를 포함해 임금이 화냈다(上怒), 임금이 대로했다(上大怒), 임금이 진노했다(上震怒) 등 임금의 노기에 관한 언급은 총 656번 나온다. 연평균 1.4번꼴이다. 전대 임금에 관한 언급을 제외한다면 기록상 당대 임금의 분노 빈도는 이보다 낮다.

대통령의 격노는 그만 전해 듣고 싶다. 특정 부처가 일을 잘했든 못했든 결국 최선의 결과물을 내도록 소통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국민에게는 중요하다. 특정 정치인이 윤심이든 아니든 선택은 국민과 당원의 몫이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전언은 해결책이 아니다. 4년여 남은 임기 동안 꼭 유념했으면 한다.

[문광민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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