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정순신 아들과 조선 과거급제자 정윤화의 죽음

김세희 2023. 3. 1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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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태형을 묘사한 형정도(刑政圖)-종로치죄<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서울대 교내언론인 '대학신문' 2064호( 3월 6일자)에 실린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과 2차가해성 소송을 풍자한 만평<대학신문 홈페이지 캡처>

1453년 조선 단종 1년. 과거 급제자 정윤화가 죽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한 후 치러야 하는 신고식 때문이다. 신고식은 선배 관원들에게 향응을 제공하는 것부터 정신적·육체적 가학행위까지 다양했다. 특히 가학행위는 오늘날 학교 폭력과도 비교해 볼 수 있는 데 △집단 구타 △얼굴에 오물 뒤집어 쓰기 △무거운 서까래 들고 서 있기 △검댕이 손을 씻은 물 마시기 △한 달 연속 숙직 등이 행해졌다.

사헌부가 정윤화 사망 경과에 대해 보고한 상소를 보면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헌부는 "행승문원박사(行承文院博士) 강폭·신자교, 저작(著作) 윤필상, 정자(正字) 권징·신의경, 부정자(副正字) 권제 등이 새로 급제한 정윤화 등 10인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준비해 이바지하게 하고, 인하여 희롱하고 침핍(侵逼-핍박)했다"며 "그런데 정윤화가 본디 종기병이 있어서 피곤함이 극해 죽기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종기라는 지병이 있던 사람도 예외없이 '학대'에 가까운 통과의례를 진행했던 셈이다. 현대의학으로 종기는 치료가 수월한 병이지만, 전근대 시대엔 죽음까지 이르렀다. 당시 최고급 치료를 받을 수 있던 왕도 죽음을 피하긴 어려웠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종·성종·효종·정조가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논해졌다. 지평 유성원은 "국가에서 이미 삼관(홍문관·예문관·교서관)에서 새로 온 사람들을 침학(侵虐-침노해 포악하게 행동함)하는 것을 금했다"며 "국문을 해야 한다"고 단종에게 건의했다. 사헌부에선 "강폭은 율(律)이 장(杖) 100대에 해당하며 나머지는 한 등을 감해 장 90대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장형은 죄인을 나무로 만든 굵은 회초리로 볼기를 치거나 의자에 묶어놓고 정강이를 치는 형벌로 100대 정도 맞으면 죽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집안의 자제들이라 처벌이 경감됐다. 강폭과 신자경·신의경은 장형보다 가벼운 태형(50대)에 파직, 공신의 아들인 윤필상과 권제는 파직 조치만 내려졌다. 실제 매를 맞았는 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보통 사대부가 자제들은 속전이라해서 돈으로 형벌을 대신하는 게 보통이었다. '학폭' 수준의 가해로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러도 대역죄 정도가 아닌 이상 사대부가 장형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당시 장형과 태형을 받는 대상은 보통 평민과 천민들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아들 정모(22)씨는 강원도에 있는 자율형사립학교 민족사관학교(민사고)에 재학 중이던 2017년부터 2018년 초까지 동급생에게 계속 학교 폭력을 행사했다. "제주도에서 온 돼지새끼", "좌파 빨갱이", "더러우니까 꺼져라" 등의 폭언을 했다. 피해 학생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공황장애 등을 진단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학교는 피해자의 신고를 받고 학교폭력 조사에 돌입했고 추가 피해자가 1명 더 나타났다. 정 씨에겐 2018년 3월 전학처분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 씨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하며 처분을 유예했다. 이 과정에서 검사 출신인 정 변호사가 갖고 있는 권력과 법 기술이 동원됐다. 권력자인 부모 덕에 전학 처분은 취소됐다. 이후 정 씨가 보인 태도도 악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무죄 판결"을 친구들에게 떠들고 다녔고, 평소에도 고위 검사였던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 많다"며 배경을 과시했다. 실제 그는 2019년 대법원 판결 직전 서울 반포고로 전학을 갔다. 심지어 반포고에서는 졸업과 동시에 그의 학폭 기록이 삭제되는 석연치 않은 일도 일어났다.

정 씨는 현재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반면 피해 학생들은 제대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조선 시대처럼 상처를 회복할 수 없는 피해자만 존재할 뿐, 가해자는 '현대판 속전'을 활용해 자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에선 '가해자 보호논리'까지 등장했다. 고은정 반포고 교장은 '학교 폭력으로 인해 관리받고 있는 아이들'과 관련한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그 학생을 집중 관리하면 낙인효과"라는 답변까지 내놓았다.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는 가해자에게 적용할 법안 사회심리학적 개념을 아무런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은 정 씨에게 적용한 셈이다. 또 반포고, 서울대 등은 정 씨의 학폭과 관련된 각종 자료 요청을 '개인정보'를 이유로 거부했다.학폭 심사과정에서 권력의 외압 작용 여부 역시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민주당은 청문회 카드를 꺼내들었고, 여당 의원마저 "청문회를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 정순신 검사특권 진상조사단은 17일 정 씨 학교폭력 문제 경위 파악을 위해 민사고를 찾았다.

'엄벌주의' 대신 '교화'에 초점을 맞추는 현재의 학폭 처벌 시스템이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정 변호사의 아들처럼 부와 권력에 기반해 학폭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개과천선(改過遷善)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뒷 배경을 활용하며 잘못을 지우고, 가난한 피해자에겐 무력한 현실만 절감하게 할 뿐이다. 화해와 통합을 추구하는 회복적 사법이 가해자 처벌 중심의 응보적 사법보다 명분을 잃을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가해자를 향한 강력한 처벌과 사회적 낙인만이 그 싹을 자를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이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성공하는 결말에 대중들이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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